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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사무엘하 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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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eerdeborah.blogspot.com/2009/12/3-1.html

방언의 은사 (1)

방언의 은사(게네 글로손)

1. 정의
관련 성구: 고전 12:10, 28; 14:13-19; 2:1-13; 19:1-7; 10:44-4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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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사는 성령이 말하게 함을 따라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비록 통상적인 목소리를 사용하지만 의식적인 생각이나 마음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말해진 언어나 노래는 전혀 배우지 않은 것들이다(David Pyt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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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특정한 사람에게 주은 은사로서, 배우지 않은 생소한 언어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며, 배우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C. Peter Wa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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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는 성령이 어떤 사람이 전혀 모르는 언어로 즉흥적으로 말하게 능력이다(Bobby Clinton).

2. 말썽 많은 방언
방언처럼 많은 말썽을 부린 은사도 드물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회 내에서의 무질서한 방언 사용으로 말썽을 빚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사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기록했을까? 사도 바울은 공중예배에서 통역 없이는 방언을 하지 말 것이며 통역이 있을 때라도 적당히 질서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방언은 또한 중세기에는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이때에는 "방언을 하는 자체가 귀신이 들린 증거"가 되어서 방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 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종교개혁, 웨슬레의 부흥운동, 미국의 제 1, 2차 대각성 운동 및 무디의 경건 운동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능력을 받는 성령 체험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모르몬교와 같은 사교집단에서만 방언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따라서 20세기의 초기에 미국의 찰스 파함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흑인 목사 윌리암 세이무어가 불을 붙인 로스 엔젤레스의 방언 운동이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인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했고, 정도가 심한 경우는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받아야 구원을 받은 것처럼 주장하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일등 신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등신자라는 인상을 가지게 하여 세속의 매스컴과 기존 교회들은 그들에게 사정 없이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었다.

당시 주류 교단과 매스컴은 이들을 혹독하게 매도했다. 이들은 오순절파를 소돔의 영적지도자들, 방언을 사탄의 마지막 토해낸 배설물, 오순절식 예배를 사탄숭배라고 공격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학력이나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방언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A
자매는 전통적인 장로교에서 배운 대로 방언은 수준 낮은 사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A 자매가 어느 은사적인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교인들의 대부분이 방언은 물론 여러 다른 신령한 은사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A 자매 보다 교육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복했고 신앙도 성숙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실을 목격한 A 자매는 마음문이 열려서 "그렇다면 나도 . . ."하면서 방언을 사모하여 쉽게 받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여태까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여러 가지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물론 방언은 구원의 신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마 초기에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마치 구원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령의 역동성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이전의 신앙생활은 인간적이고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실상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방언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등 신자는 더욱 아니다. 방언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오늘날에도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는듯하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방언 운동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성령 운동은 유럽, 인도, 러시아로 확장되어 갔고 남미에서 가장 많은 결실을 거두어서 오늘날 남미 개신교 신자의 거의 80%가 오순절 계통이다.

비난과 경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던 성령 운동방언 운동은 거부, 핍박 및 관용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수용 및 적용의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세월이 지나, 성령 세례의 초기의 실질적이고 유력한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던 고전적인 오순절주의자들도 이 주장을 어느 정도 수정하기에 이르렀고, 1960년대에 주류 교단에 퍼지기 시작한 은사운동은 방언을 성령 세례의 "여러 가지 표적 중의 한 가지 표적"으로만 인정하였고 이후 지속된 여러 성령 운동도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이것도 보면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소한 영적인 현상이나 가르침이 일어나면 초기에는 이런 저런 신학으로 부정하다가 주변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주장하거나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요한 목사>

방언의 은사 (2)



방언의 은사
1. 과연 서로 다른 방언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한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7-8).

그렇지만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더러 있다.

2. 표적 방언과 은사 방언?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거하는 "표적 방언"이고 고전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표적 방언은 단회에 끝나지만 은사 방언은 은사 받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로 오순절 계통에서 하는 주장이다.

3. 나라 방언과 은사 방언?
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나라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자기 나라말로 알아들었지만 고전의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방언하는 사람이 방언할 때 방언하는 본인이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여 그 외국어가 본국어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의 방언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물론 성경에서 구분해 놓았으니 구분은 해야되겠지만 꼭 본질이 다른 방언일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즉 비록 제자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을 했지만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방언 통역을 하여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한 나라 말만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8, 11). 

오늘날 "나라 방언"을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기가 모르는 어느 한 외국어로 했다는 간증은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 말들"로 들었다는 간증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제자들의 방언을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하여 여러 다른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4. 차이에 관한 견해
정리하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의 차이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가 된다.

. 첫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초기의 성령 체험을 실질적으로 증거하는 것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다.

. 둘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는 나라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은사 방언이다.

.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했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통변을 따로 해야 하는 은사 방언이다.

문제는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가이다.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구분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같지는 않다. 표적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나라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문제는 방언의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 본질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귀신론의 경우,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귀신의 기원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실제로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서로 물고뜯는데 소진하는 것을 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귀신의 기원에 하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의 잘못을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축사나 영적 전쟁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귀신의 기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교인들이 귀신들려 있으면 어떻게 해야될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외적 구분이 아니라 본질이다. 나라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표적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자기 나라 말로 들은 사람들은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11).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으로 인해 방언을 한 사람들도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높였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6)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5-16).

사도행전의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든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점이 방언의 외형적인 구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요한 목사>

방언의 은사 (3) – 방언의 유익 1



방언의 유익 - 방언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인 유익은 모르고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나쁜 것만 보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면 합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는 입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죄인들이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지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거듭났지만 말썽 부리고 죄짓는 신자가 많다. 신자의 신분의 확실성,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보지 않고, 그의 현실적인 나쁜 행위만 보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군," "바른 교리를 입으로 고백은 잘하지만 고백한 대로 살지는 못하는군"이라면서 구원 받은 신분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불완전한 신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신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용서 받은 죄인,"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

그런데 왜 유독 방언과 같은 영적 체험이나 영적 현상만은 완벽하기를 바라는가? 방언의 유익이 더 많지만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몇 가지 나쁜 것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

방언은 언뜻 보면 말썽만 부리는 은사인 것 같지만 유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1. 방언의 유익

. 통역된 방언은 공중의 덕을 세운다. 공중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고전14:5).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의 효과를 가져와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역할을 한다(고전14:4). 그러나 통역을 하지 않은 방언,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공중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다(고전14:23).

남을 가르칠 때에는 알아듣는 말 다섯 마디가 통역이 없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14:19). 여기서 "남을 가르칠 때"라는 말에 유의하기 바란다. 방언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남을 가르칠 때는 무익하다는 말이지 방언 자체가 무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역 없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다(고전14:27-28). 또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방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언하는 자체만을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23).

방언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방언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마음문을 열어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일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헬라어 글로싸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말(language)을 의미하므로 방언은 알아 듣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알아 듣지 못하는 말"(고전 14:2)이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죽은 믿음"도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란 절대적인 표현이 불가능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다.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성은 되지만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란 뜻이다.

.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돕는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4).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는 방언이 반드시 통역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공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혼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시간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할 것인가? 개인의 영성 개발 없는 단체의 덕은 있을 수 없다.

방언의 효능은 개인의 내적 영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는 방언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병이 났을 경우 병원에 가서 의사가 수술하면 병이 낫는다. 환자가, 의사가 치르는 수술의 모든 과정을 모른다고 해서 수술 받는 것이 소용 없는 짓인가? 환자는 의사의 수술을 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그 사실만 알면 된다.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복잡한 수술 과정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방언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방언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의 말이기 때문이다(고전 14:2).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하면 심령에 평강이 임하고 기도의 응답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할 때 병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난다는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할 것인가? 나는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만 고장이 나면 번번히 전문가에게 가서 고친다. 복잡한 수학공식같은 것이 딱 질색이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나에게 필요가 없는가?

나는 컴퓨터의 스윗치를 켜서 내가 익숙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지금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그 정도만 알면 되지 않는가? 내가 컴퓨터의 복잡한 구조를 모른다고 해서 나에게 컴퓨터가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방언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기도응답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않지만 우리의 영은 분명히 열매를 맺는다(고전 14:14). 우리의 영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방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임재 속에 쉽게 들어간다. 보통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실질적으로, 체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하기 전에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금방 가시고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기분을 가진다
.

그렇다고 꼭 방언 기도를 해야 이런 식으로 응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는 은사를 통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 진다는 말이다


방언의 은사 (3) – 방언의 유익 2

. 방언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2:11; 2:45-46; 고전 14:15) 방언으로 찬송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나는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글을 보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언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보통의 말로 하는 찬양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하물며 영으로 찬미하는 방언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언젠가 미국인이 인도하는 찬양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찬양인도자가 가사 있는 찬양을 어느 정도 인도한 후에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허-밍 비슷하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응답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의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방언 찬송도 하고 신령한 노래도 불렀다. 그것은 마치 "허다한 무리의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1:24).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19:6).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자( 1;24), 예수님의 음성이며( 1:15), 동시에 구원 받은 허다한 백성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다( 19:6). 

미국 암흑가의 깡패를 전도시킨 것으로 유명한 데이빗 윌커슨 목사와 [십자가와 깡패](The Cross and the Switchblade)를 집필한 성공회 신자이자 신문기자인 존 셔릴은 방언 찬송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
음악이 시작됨에 따라 탁자주위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악보도 없는 즉흥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찬양인도자는 더 이상 노래를 인도하지 않고 음악이 흐르는 대로 맡겨두었다. 누구의 인도함도 없이 회중의 사분지 일 정도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한 가지 하모니와 또 다른 하모니가 들락날락하며 서로 영글어 졌다.”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고전14:15), 신령한 노래(5:19; 3:16), 성령 안에서 노래 부르기, 또는 하나님의 존영(the high praises of God) (149:6)이라고 한다. 제임스 던은 신령한 노래( 5:18)가 곧 방언 찬송이며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음성가나 경배송을 신령한 노래하고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체험했다. 어느 주말 재학 중인 신학교를 출발하여 섬기는 교회를 향해 약 2시간 동안 운전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감이 있는 찬양 테이프를 들으면서 얼마간 따라 부르고 있노라니 갑자기 심령 깊은 곳에서 생전에 듣지 못한 고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하면서도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듯한 소리였다. 부르고 있노라니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듯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5)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개인의 경건 시간에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매우 즐긴다. 방언 기도보다는 방언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된다 방언의 주요 기능은 기도와 찬양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그런 만큼 방언 말함은 곧 방언 기도이자 방언 찬양이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초청하는 좋은 수단이다. 필자도 어떤 경우에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방언을 말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예언 사역을 강조하는 미국의 크리스천 인터내셔날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의 일환으로 방언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서로를 위해 방언 기도를 한 후 잠시 침묵했다가, 떠오르는 생각, 느낌 또는 음성을 나누면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필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을 때는 회개 기도를 철저히 하고 방언 기도를 많이 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보통 때 듣지 못하는 여러 음성을 더욱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언이야 말로 모든 다른 은사로 통하는 대문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 때마다 쉬지 말고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14-15) 특별한 경우 외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혀를 통제하므로 무한정 할 수 있다.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시간 상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오토매틱 파일러트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고전12:18),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12:39).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고전12:30), 자기는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므로(고전12:5),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고전12:39).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는 그 내용을 모르지만 성령께서 내 대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기도 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6-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이 기도가 곧 방언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기도 자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로가 자기의 체험이나 무체험을 증거하는 구절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방언기도든 보통 기도든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방언 기도에도 해당이 되고 보통 기도에도 해당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6)

중요한 것은 때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깨달았다. 언젠가 교인 한 명이 뺑소니 교통사고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나에게 법원에 가서 영어로 통역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판사 앞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통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판사는 나에게 "뺑소니 교통사고는 사안이 중요한 사건이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판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법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대하다가는 자칮 잘못하면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법을 전공한 사람들끼리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전문적인 지식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나같이 법에 대한 일반인이 나설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어떤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가 많다. 이때 성령은 우리 사정을 잘 아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존경하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 연구>에서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자의 입장과 서신서를 역사서인 사도행전보다 우위에 놓은 잘못된 입장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전반적으로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주기도문 식으로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다고 한다.

글쎄? 나는 훼케마와 같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주기도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때로는 도대체 내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방언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나는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방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노라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때로는 성령께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신다. 내가 마땅히 어떻게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완전히 내 입장이 되셔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 레이몬드도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몬드, [신오순절 운동 비판],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4).

이런 주장도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에 근거한 주장에 불과하다.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방언의 은사 (3) – 방언의 유익 3

. 방언은 영적인 무기다
말로 알아 듣을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이 영적인 무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방언 기도와 방언 찬양은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성령의 능력은 귀신의 세력을 물리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2:28).

성령 안에서 하는 방언 기도와( 6:18; 20), 방언 찬송( 5:18)은 사단을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인 무기이다.

방언은 귀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심하게 귀신 들려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눕혀 놓고 방언 기도를 얼마 동안 했더니 드디어 귀신이 참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귀신의 세력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방언 기도를 이기지 못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귀신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세력이 한 풀 꺽였다는 말이다. 무장해제를 당했다는 말이다( 2:15).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더러운 것아 썩물러가라"고 하면된다.

언젠가 잠을 자다가 필자는 강력한 귀신의 공격을 당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귀신이 워낙 강하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때 갑자기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언 하라." 있는 힘을 다하여 방언을 했더니 귀신이 삽시간에 물러갔다.

주의: 귀신 방언
귀신 방언(demonic tongue)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방언은, 기독교는 물론, 불교, 모르몬교 등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난 현상이다. 또한 말세에는 사단의 활동이 심해지며(딤전 4:1),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므로(고후 11:14),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야 한다(요일 4:1).

나는 방언 귀신(tongue demon)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체험한 것은 단 한 번이다. 제랄드 맥그로 박사는 미국 뉴욕주 소재의 얼라이언스 신학교에서 실시한 [능력 대결](Power Encounter)강의를 통해, 자신의 임상 경험에 의할 때 믿음이 강한 신자들도 방언 귀신에 속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밝히며 영을 분별할 것을 강력히 권면했다.12)

나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방언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웬지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 수없이 방언 기도를 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언제나 방언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즉시 방언 귀신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이름으로 쫓았다. 이후 방언 귀신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방언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이 방언 하는 것을 들으면 괜히 마음이 섬뜩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혹시 내가 귀신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점검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든 방언 기도를 하든 마음에 평강이 임하지 않고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대부분이 귀신의 장난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4:17). <구요한 목사>

방언의 은사 4

말썽은 있지만 유익한 방언
이처럼 방언은 말썽과 위험의 소지도 있지만 유익한 은사이다. 이 세상에서 유익한 것치고 말썽의 소지가 없는 것은 없다.

자동차는 너무나 유익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로로 다치거나 죽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해서 자동차 타지 말고 자건거 타자고 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무엇이 위험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유익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소정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고 각종 교통안전법규가 있는 것이 아닌가
?

방언도 마찬가지다. 일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방언을 자랑하고 남용한다고 해서 은사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취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

우리는 은사에 대해 사도 바울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방언은 비록 말썽 많은 은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고 방언은 물론 더 많은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전 1:4-7).

방언이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사용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을 모두 제대로 잘 사용하고 있는가?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이 중요한 은사가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의 제일 골찌에 언급했다면서 방언 무용론을 내세운다(안토니 훼케마[방언 연구](신망애출판사, 1982).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 그렇게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방언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그런데 훼케마는 자신 성경을 넘어서는 판단자가 되어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연 훼케마가 주장하는 대로 방언이 마지막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은사인가?. 근접 문맥에 있는 고전 13장은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또한 성경은 가장 작고 약한 은사가 가장 귀한 은사라고 기록한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물론 이 구절은 방언을 가장 귀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에게 한 말이지만 훼케마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방언이 가장 별 볼 일 없는 은사라면, 이 구절에 의할 때 말썽부리고 소용없다는 방언이 오히려 가장 요긴한 은사가 된다는 말이다.

방언이 마지막에 기록되었고 말썽 부리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는 은사라고 주장하는 훼케마의 논거 자체가 잘못된 억지라는 말이다.

한편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고든 피는 안토니 훼케마와는 달리 방언을 성경적으로 자세히 증거한 후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유익한 은사라고 결론짓는다 (Gordon D. Fee, "Toward a Pauline Theology of Glossolalia," Listening to the Spirit in the Text , Eerdmans, 2000).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 . .

많은 현대인들이 이 현상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 생소한 것에 대한 두려움, 명백하게 합리적인 아닌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것, 은사주의자들로 인한 몇 가지 나쁜 경험들 등),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런 체험을 오랫 동안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학적 견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 현상에 대해 오순절주의자들이 종종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이 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바울의 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기양양한 태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기도나 찬양은(고전 14:15-17), 기본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가치를 깍아내려 버린다. . . .

바울이 엄하게 꾸짖은 것은 공중 집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방언 말하는 것이었다. 그외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방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도 기도하고(즉 방언도 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다"라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 .

결론적으로, 바울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방언 말하는 것은 그의 모든 신학적 전망에 부합된다. 이제 우리는 방언을 통해 찬양, 감사, 기도 및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심령 깊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연약함 중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연약함 중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고 바울은 주장한다." 

요약하면, 이해 부족으로 인해 다소 말썽은 있었지만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방언 말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공중 앞에서 사용할 때는 교회의 덕을 위해 반드시 통역해야 한다.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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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방언 기도의 유익에 대해
이종관목사 2010-10-30 15:51:36 555

지난 목자 수련회 이후, 방언을 경험하시고 방언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의 열기가 뜨겁게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일각에서는 오해도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주간에 걸쳐서 편지를 통해 방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외국어 방언' 으로

전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입니다.(행 2:1-6)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유창하게

또는 일부 구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는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늘의 언어' 로서 억양이나 발음이 외국어처럼 들리지만,

언어 구조를 갖지 않은 방언이 있습니다.(고전14)

처음 방언을 받게 되면 대개 "랄랄랄라라라" 와 같이

혀가 꼬여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닌 이상한 발음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방언으로 오래 기도하면 성령께서 단음이 아닌 다양한 발음,

자기만의 스타일로 방언을 바꾸어 주십니다.


방언기도에는 유익이 있습니다. 방언 기도에 대한 유익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강해집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

여기서 '덕을 세운다' 의 의미는 헬라어로 '건축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을 보면, 덕을 세운다는 것이 위로받고 격려받고

안위를 받아서 믿음이 세워진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부르거나, 믿음의 말로 격려를 받을 때 우리 마음이 밝아지고

힘을 얻고 믿음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방언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이러한 믿음의 세워짐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방언은 우리 마음이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덕을 세울까?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덕을 세움은 마음을 거치지 않고 영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본인의 영으로 하는 기도는 본인에게 덕을 세웁니다.


 

둘째, 고전14:15-17절을 보면,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으로 드리는 기도, 감사, 찬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 기도를 오래하다 보면 내 생각이나 욕망, 세상적인 욕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셋째, 기도 생활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지성의 한계를 느낍니다.

방언은 우리 지성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의 영이 기도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우리의 지성은 기도의 언어를 많이 만들어 내려고 하고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하나님께 집중하지도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기도의 언어를 만드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고 기도가 쉬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받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니까 "뜻도 모르는 방언을 왜 말해야 하는가?

뜻을 알 수 없다면 해도 무의미 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방언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영이 하는 것이지,

혼(마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우리의 정신적, 육적인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지만,

영적으로 덕을 세우고 믿음을 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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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의 유익
장봉운 목사 (중국선교연구원)


  방언을 처음 받게 되면 신기하고 새로운 감격으로 인해서 흥분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는 좀 달랐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시작한 사업이 망해서 무척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고 아내의 권유로 은사를 받은 동내에 사는 순복음 교회에 다니는 어떤 여집사님에게서 안수를 받는 가운데 혀가 말리면서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줄곧 그 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발길이 닿아 선택한 교회가 모두 통합교단의 교회이었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안수나 방언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흥미도 없었습니다. 사업에서 실패하면서 풀이 죽어 있던 때이었기에 기도를 받게 된 것이지요. 제 아내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받았지만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방언이 나오려고 하면 기도를 중지하였고, 이렇게 계속 거부하니까 언제인지는 몰라도 방언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목사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88년에 소명을 받으면서 다시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방언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아무튼 방언을 처음 하게 되면 신기하고 놀라워 하며,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별로 재미도 없고 유익도 없이 그저 의미 없는 단조로운 소리만 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울리는 괭가리 같이 느껴지니까 방언을 하는 것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이 더러 있고, 방언을 하면서도 별로 유익을 얻지 못하고 그저 하니까 하는 식으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유익하지도 흥미롭지도 못한 것 말입니다. 어떤 것에 흥미를 느껴 그것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 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방언 역시 이런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은 방언의 유익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하면서도 이것이 방언으로 인해서 오는 유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포괄적인 내용을 적고 있지요. 그 까닭은 세대를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게 다 적용되는 최고의 가치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부분을 다룰 수 없습니다. 이 원론적인 성경 말씀이 우리 개인에게 적용되고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요.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큰 유익은 자신의 영(속사람을 포함함)이 영적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힘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 지적인 힘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지적인 힘은 자신감을 갖게 하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바르게 대처하게 하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하는 등의 유익을 주지만 영적인 힘은 지적인 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에 더하여 마귀로부터 보호 받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요. 이 부분이 영적 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방언은 우선 이 부분에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대적인 마귀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보가 보호되지 않는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에서는 별로 손해를 볼 것이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기업의 형태를 띄면 반드시 정보가 보호되어야만 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역시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보가 보호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다면 우리는 마귀에게 심하게 이용당하거나 침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우리의 정보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상호 교통의 통로로서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중요한 정보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전략이 무용지물이 되어 마귀를 물리치는 힘이 약화됩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은 방언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지만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능력 행하는 일과 방언이 필수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따라서 기도합니다. 물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영이 전혀 기도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구성으로 기도하는 그 순간 자신의 영이 함께 기도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느끼더라도 보다 막연하고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이 부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물론 방언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신의 방언을 별로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방언을 못하는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영이 지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만으로도 유익합니다. 자신의 영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실제적 순간이니까요.

  구체적으로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알아보겠습니다.
  방언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깊이 경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했고, 우리에게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방언 기도는 우리의 속 사람을 강하게 함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영의 소원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원수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영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며 약점을 지니게 됩니다. 이 약점을 마귀가 알게 되면 마귀는 놓치지 않고 우리의 영을 공격합니다. 이 약점이 노출된 영은 마귀로부터 심각하게 공격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손상을 입게 되며 이 증상은 즉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으로는 영이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영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 그 요구하는 바를 전달하게 되는데요 주로 많이 사용되는 수단이 느낌입니다. 이 느낌에 대해서는 앞서서 다루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영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지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영의 요구하는 바를 깨달아 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방언은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수단이 됩니다. 방언은 영의 요구하는 바를 우리의 의식에 전하는 매체의 역할을 합니다. 물론 방언이 통역 되면 이 부분이 명쾌해지지요. 그래서 방언 말하는 사람은 통역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역은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대가 없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이 부분은 선택사항 즉 옵션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방언은 말할 줄 알면서 통역을 구하지 않아서 그 뜻을 모르는 것이지요. 통역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주님 저에게 통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구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통역은 예언의 기능이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지요.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실함이 보장되지 않으면 예언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격 요건이라기 보다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예언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스럽고 은혜로운 자리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살펴야 할 사람이 있지요. 살펴야 할 조건들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성찬에 참여하면 그는 죄를 마시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처럼 예언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신실성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통역을 구하였는데 통역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한다고 해서 그 즉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충 구하고 주지 않는다고 포기한다면 평생 얻을 수 없습니다. 구하기를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한번 구했으면 주실 때까지 매달리고 애걸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방언 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이 부분 역시 개인에 따라서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가 이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면서 그 사이 사이에 사람의 말을 합니다. 그러데 그 말이 자신의 의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신이 압니다. 방언 통역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은 그 내용이 너무 싱겁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설마 통역일까 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중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찮게 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정말로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줍니다. 처음에는 매우 하찮은 것 같은 것으로 우리의 믿음과 자세를 시험하십니다. 쉽게 예를 들면 처음 입사한 신입사원을 대할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신입사원에게 처음부터 큰 것을 맡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큰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매우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이것이 통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이런 과정을 많이 겪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하다고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주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그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때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적어도 10년 내외의 기간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얻는 기간이지요. 그러나 3년 정도 지나면 이 비밀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실질적이고 깊이 있는 통역이 이루어지고 기도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는 유익은 속 사람의 강건이 가장 큰 유익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영은 치유를 받고 청결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청결해집니다. 그리고 방언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에 활력을 얻게 합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방언을 필수입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고는 은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은사를 받는 것은 안지만 방언을 말하지 못하고는 은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방언은 은사의 통로가 됩니다. 특히 능력 행하는 은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이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전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방언의 유익은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깊은 기도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 통로를 더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통로는 무수합니다. 그 많은 통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 몇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 많은 방법 가운데 방언은 비교적 손쉬운 방법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는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말로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 말에 매이게 되지요. 우리의 의식을 이끌어내는 뇌는 한 가지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오직 의식을 이끌어내는 작용에 쓰임을 받기 때문에 다른 작용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쉼을 얻게 됩니다. 한가해진 우리의 의식은 쉼을 얻어야 하는데 훈련되지 않은 우리의 의식은 쉬지를 않고 분주하게 작용을 계속합니다.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우리의 뇌는 제멋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무수히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의 쉼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등을 통해서 그 기술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고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기도에 이르지 못하고 항상 겉돌기만 합니다. 떠도는 생각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주님이 방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음성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처음에는 잘 안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묶는 훈련은 생각의 초점을 한군데 모으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그 곳에 모으십시오. 자칫하면 생각이 달아납니다. 그러면 바로 생각을 모으세요. 달아나는 생각과의 싸움을 계속하면 생각이 자신의 통제에 순종하는 때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의 고삐를 잡아맬 수 있어야 그 다음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세상에는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있지요. 전문가는 그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회자가 아니면 그런 훈련까지는 필요 없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왕초보는 면해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멋대로 떠돌도록 내버려 두면 주님이 주시는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방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하면 우선 떠도는 생각을 묶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훈련하면 쉽게 되지만 혼자 하려면 힘이 듭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훈련원이 필요하지요. 이 훈련을 받고 그 기술을 몸에 익히면 그 기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자동적으로 됩니다. 몸에 익힌 기술은 머리에 넣은 지식과는 달라서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떠도는 생각을 잡는 기술은 훈련을 통해서 몸에 익혀두어야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 두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양한 유익이 있지요.
그런 유익을 얻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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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hweh, Elohim, al-Lah, God is the presence
in whom my being comes alive
the core and ground of my existence
the infinite and inexhaustible ground of all being
the source of life and goodness
the fountain of all holiness
the originator of unconditional love and
the initiator of the Big Bang.

This presence calls me to fulness of life
to praise and thanksgiving
to integrity and wholesomeness and
to courageous vulnerable love.

Rabbi Jesus the Messiah teaches me
to live fully
to act justly
to love tenderly
to walk humbly with my God and
where necessary to lose graciously.

-----------------------------

All praise belongs to God,
Lord of all worlds,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Ruler of Judgement Day.

It is You that we worship,
and to You we appeal for help.

Show us the straight way,

the way of those You have graced,
not of those on whom is Your wrath,
nor of those who wander astray.

-----------------------------

Beloved God,
help us all to love you
more and more,
and more and more,
and still yet more,
until we become worthy of union of you;
and help us all to hold fast to Baba's daaman
until the very end.

-----------------------------

Blessed are You, O Lord our God,
Wellspring of all that is.

You are the sea on which we float,
You are the wind that fills our sails,
You are the storm that buffets us,
You are the calm that brings us peace.

Open our ears to hear Your word,
Open our eyes to see Your beauty,
Open our hearts to be warmed by Your love.

Free us from our lonely prisons of fear and selfishness,
And make us over, day by day, into bearers of Your peace.

-----------------------------

Center of all centers, core of cores,
almond self-enclosed and growing sweet-
all this universe, to the furthest stars
and beyond them, is your flesh, your fruit.

Now you feel how nothing clings to you;
your vast shell reaches into endless space,
and there the rich, thick fluids rise and flow,
Illuminated in your infinite peace.

A billion stars go spinning through the night,
blazing high above your head.
But in you is the presence that
will be, when all the stars are dead.

-----------------------------

Father, I abandon myself into your hands;
do with me what you will.
Whatever you may do, I thank you:
I am ready for all, I accept all.
Let only your will be done in me,
and in all Your creatures -
I wish no more than this, O Lord.

Into your hands I commend my soul;
I offer it to you with all the love of my heart,
for I love you Lord,
and so need to give myself,
to surrender myself into your hands,
without reserve,
and with boundless confidence,

For you are my Father.

-----------------------------

Glory be to the Father
and to the Son
and to the Holy Spirit.
A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ever shall be,
world without end.
Amen

-----------------------------

Glory to God in this marvellous form - half man, half lion!
Glory to that Great Lion!
Glory to the Divine Lion of great strength!
Glory to that Terrible Lion, the Great God!

Glory to that Wrathful One with terrible eyes,
Who, by His own desire, is born from a pillar,
although He is unborn and the Source of everything!
Let us praise the All-Wonderful Consort of the Goddess of Fortune,
Who takes pleasure in yoga and removes
the suffering of His devotees,
whose hearts He has stolen
the first time they heard about His great deeds!

I adore my Five-faced Lord, Who always
sees and protects all directions.
I bow before the Supreme Absolute;
before Him who is utterly terrible and supremely merciful.
I bow before Him of flaming face,
Who is surrounded by a garland of flames.
How can I describe that Great Flame, the Great Lord?

Forever I want to sing the glories of Him,
Who possesses innumerable wonderful qualities.
His eyes are everywhere,
reflected in the eyes of a child, or an old man,
a rainbow, or a flower.
And yet, He is so difficult to behold!
But still, I long to see Him, the Destroyer of Enemies.

Arise, oh Lord, let Thy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ose that hate You flee from You!
Then, as You please, return, oh Lord,
to rest among Your children!

Please, bless us,
who will gather around You, feeling so safe,
like baby birds that huddle under the wings of their mother;
wings that feel so incomparable soft from underneath,
although that mother-bird looks fierce from the outside,
with sharp beak and watchful eyes,
ready to protect it's little ones.

Kindly rest among us, oh Darling of Lakshmidevi!
For we long for You, just like a thirsty field,
above which heavy black clouds are hanging,
but still no rain is falling.
Such is the longing of Your children,
whose hearts remember You,
Whose beauty excels the clouds',
but whose eyes cannot see You,
oh Destroyer of enemies, oh Great Lord!

You are the Creator,
and You are the One
Who dissolves all creation.
You are the Non-doer;
ever changeless; resting in Yourself.
And You are the Doer behind everything,
without Whose will neither a leaf falls,
nor a cat licks it's paws,
nor a woman blinks her eyes.

You are the Infallible,
the Almighty,
the Soul of the Universe.
You are beyond all material qualities;
You are the Inconceivable!

All the Vedas worship You,
You are the Form of all mantras,
and the Soul of all yantras.
Your thousand arms are everywhere.
You are the Giver of boons, full of joy,
the Maintainer of the universe!

Decorated with sandalwood paste and Tulasi leaves,
Your lotus feet are so lovely to behold.
Your broad chest,
which is the eternal resting place of Lakshmi Ma,
is adorned with the Srivatsa mark, the Kaustubha jewel,
and with shiny golden necklaces.
You raise one of Your soft lotus hands to bless Your devotees,
while Your other hand gently holds Your devotee Prahlad.
The nails of those hands are the most powerful weapons,
and their touch is the source of all auspiciousness.
Your teeth are like thunderbolts,
and Your beautiful mane has become even more beautiful
by getting sprinkled with the blood of your enemies.

Wearing a beautiful garland of forest flowers,
You shine like the light of the sun.
You are the Supreme Soul, the Supreme Light.
You are the Supreme Truth, and the Supreme Refuge.
Your Form is eternal, full of knowledge and full of bliss.

Let me rest in Your divine hand!
For You love those that take refuge in You
more than a cow loves her new-born calf,
whose body is gently caressed by her tongue.

You are the life-giving Soul of everything,
the protector of Prahlad,
and me.

-----------------------------

God, I offer myself to Thee -
to build with me
and to do with me as Thou wilt.
Relieve me of the bondage of self,
that I may better do Thy will.
Take away my difficulties,
that victory over them may bear witness
to those I would help of Thy Power,
Thy Love, and Thy Way of life.
May I do Thy will always!

-----------------------------

God is the light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smile of God's light
is like a niche in which is a lamp,
the lamp in a globe of glass,
the globe of glass as if it were a shining star,
lit from a blessed olive tree
neither of the East nor of the West,
its light nearly luminous
even if fire did not touch it.
Light upon light!
God guides to this light
whomever God will:
and God gives people examples;
and God knows all things.

-----------------------------

God! There is no god but He -
The Living, The Self-subsisting. Eternal.
No slumber can seize him nor sleep.
His are all things in the heavens and on earth.
Who is there that can intercede in His presence except as He permitteth?
He knoweth what is before or after or behind them.
Nor shall they encompath aught of His knowledge except as He willeth.
His Throne doth extend over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he feeleth no fatigue in guarding and preserving them for He is The Most High, The Supreme.

Let there be no compulsion in religion.
Truth stands out clear from error:
whoever rejects Evil and believes in God
hath grasped the most trustworthy handhold, that never breaks.
And God heareth and knoweth all things.

God is the Protector of those who have faith;
From the depth of darkness He will lead them forth into light.
Of those who reject faith the patrons are the Evil Ones;
from light they will lead them forth into the depths of darkness.
They will be Companions of the fire, to dwell therein forever.

-----------------------------

God to enfold me,
God to surround me,
God in my speaking,
God in my thinking.

God in my sleeping,
God in my waking,
God in my watching,
God in my hoping.

God in my life,
God in my lips,
God in my soul,
God in my heart.

God in my sufficing,
God in my slumber,
God in mine ever-living soul,
God in mine eternity.

-----------------------------

Hear, 0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ght.

-----------------------------

He is the Compassionate, the All-Bountiful!
O God, my God!
Thou seest me, Thou knowest me;
Thou art my Haven and my Refuge.
None have I sought nor any will I seek save Thee;
no path have I trodden nor any will I tread
but the path of Thy love.
In the darksome night of despair,
my eye turneth expectant and full of hope
to the morn of Thy boundless favor
and at the hour of dawn my drooping soul is refreshed
an strengthened in remembrance of Thy beauty and perfection.
He whom the grace of Thy mercy aideth,
though he be but a drop,
shall become the boundless ocean,
and the merest atom which
the outpouring of Thy loving-kindness assisteth,
shall shine even as the radiant star.

Shelter under Thy protection, O Thou Spirit of purity,
Thou Whom art the All-Bountiful Provider,
this enthralled, enkindled servant of Thine.
Aid him in this world of being
to remain steadfast and firm in Thy love
and grant that this broken-winged bird
attain a refuge and shelter in Thy divine nest
that abideth upon the celestial tree.

-----------------------------

He speaks sweetly dear,
that enlightener love of mine.

I'm exhausted having searched his words; he never speaks unkind.

He knows not foul language,
the pure and perfect embodiment of the infinite;
he lets my weaknesses go unrecorded.

The polluted ones, he makes pure, as is his nature.
Not one virtue does he leave unrewarded.

In each and every, and all, he dwells, nearest of the near.

Slave Nanak seeks his protection divine.
That sublime,
immortal,
enlightener love of mine.

-----------------------------

Holy Spirit,
Giving life to all life,
Moving all creatures,
Root of all things,
Washing them clean,
Wiping out their mistakes,
Healing their wounds,
You are our true life,
Luminous, wonderful,
Awakening the heart from its ancient sleep.

-----------------------------

How wonderful, O Lord, are the works of your hands!
The heavens declare Your glory,
the arch of the sky displays Your handiwork
In Your love You have given us the power
to behold the beauty of Your world
robed in all its splendor.
The sun and the stars, the valleys and the hills,
the rivers and the lakes all disclose Your presence.
The roaring breakers of the sea tell of Your awesome might,
the beast of the field and the birds of the air
bespeak Your wondrous will.
In Your goodness You have made us able to hear
the music of the world.
The voices of the loved ones
reveal to us that You are in our midst.
A divine voice sings through all creation.

-----------------------------

image of God
born of God's breath
vessel of divine Love
after his likeness
dwelling of God
capacity for the infinite
eternally known
chosen of God
home of the Infinite Majesty
abiding in the Son
called from eternity
life in the Lord
temple of the Holy Spirit
branch of Christ
receptacle of the Most High
wellspring of Living Water
heir of the kingdom
the glory of God
abode of the Trinity.
God sings this litany
eternally in his Word.
This is who you are.

-----------------------------

Indeed, You alone know Yourself
by Your own internal potency,
O Supreme Person,
origin of all,
Lord of all beings,
God of gods,
Lord of the universe!

-----------------------------

It can be heard in the doleful cry
Of a lonely whippoorwill . . .
In zephyr winds that softly touch
The nodding daffodil.

It can be seen in myriad reflections
On a moonlit lake . . .
In candles gleaming happily
Upon a birthday cake.

It can be felt in soothing warmth
Of summer's shining sun . . .
In rhythmic throbbing when two hearts
Beat metrically as one.

It can be smelled in sun-parched planting's
Gratitude for shower . . .
In the scent when soft wind kisses
Spring's first fragrant flower.

It can be savored only in
Undying thirst for Thee . . .
In lonely man imploring God
In meek humility.

It can be sensed while treading in
The paths where saints have trod . . .
In living, talking, loving, walking
Hand-in-hand with God.
 
-----------------------------

In the beginning was God,
Today is God,
Tomorrow will be God.
Who can make an image of God?
He has no body.
He is the word which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ord!
It is no more,
It is past, and still it lives!
So is God.

-----------------------------

In the Name of God, Most Gracious, Most Merciful.

Praise be to God, the Cherisher and Sustainer of the worlds,

The most Gracious, Most Merciful,

Master of the Day of Judgement.

Thee do we worship, and Thine aid we seek.

Show us the straight way.

The way of those on whom Thou hast bestowed Thy Grace, those whose (portion) is not wrath, and who go not astray.

-----------------------------

It was the wind that gave them life.
It is the wind that comes out of our mouths now
that gives us life.
When this ceases to blow we die.
In the skin at the tips of our fingers
we see the trail of the wind;
it shows us the wind blew
when our ancestors were created.

-----------------------------

I am always with you,
even when you are not able to feel me in your heart.
I love you always,
I surround you with my protecting love,
even when you occasionally forget me.
I listen to your problems,
if you are sincere and receptive, I give you solutions.
I hear your prayers and answer those which are in the best interest
of everyone in your life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you.

I am the light and the thoughts in your mind,
I am the sight in your eyes,
I am the life in your body,
I am the feelings you feel in your heart.
I am always at work in your life for your greater good,
although you may not always believe this;
hopefully, your faith in me will grow constant.
you must realize:
"my will is whatever is happening in the present moment".
within this moment you must think and act
with integrity, humility and courage,
you must trust in me,
and surrender your will to mine through acceptance.
if you continue to demonstrate acceptance,
integrity, humility, courage and trust,
you will discover the secret of opening your heart to my love.
the greater your faith in me
the more I am able fill your heart with my love.

it is I, who grants you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you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you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eventually you will realize the samplings of love
I bestow on you through others
are purposefully designed to draw you closer to me.
it is only I, who loves you unconditionally,
I am an ever-flowing fountain of love, peace and joy,
I will never disappoint you; I will always be with you.
I mete out to you the exact amount of pain you cause others,
because I want you to be compassionate.
I want you to be able to give love and equally as important,
I want you to be able to receive love.
how else will you learn to love me?
how will you learn to accept my love?
the moment you realize the error of your ways,
the moment you sincerely regret the pain you cause others,
I forgive you; I nourish you with my tender mercies.
remember, I never stop loving you for you are my precious child.

-----------------------------

I am, O my God,
but a tiny seed which Thou hast sown
in the soil of Thy love,
and caused to spring forth by the hand of Thy bounty.
This seed craveth, therefore,
in its inmost being,
for the waters of Thy mercy
and the living fountain of Thy grace.
Send down upon it,
from the heaven of Thy loving-kindness,
that which will enable it to flourish beneath Thy shadow
and within the borders of Thy court.
Thou art He Who watereth the hearts of all
that have recognized Thee from Thy plenteous stream
and the fountain of Thy living waters.
Praised be to God,
the Lord of the worlds.

-----------------------------

I arise today
Through a mighty strength:

God's power to guide me,
God's might to uphold me,
God's eyes to watch over me;
God's ear to hear me,
God's word to give me speech,
God's hand to guard me,
God's way to lie before me,
God's shield to shelter me,
God's host to secure me.

-----------------------------

I bear witness, O my God,
that Thou hast created me to know Thee
and to worship Thee.
I testify, at this moment,
to my powerlessness and to Thy might,
to my poverty and to Thy wealth.
There is none other God but Thee,
The Help in Peril, the Self-Subsisting.

-----------------------------

I beg Forgiveness of Allah, my Lord
From all the sins which I have committed,
Consciously and unconsciously,
Hidden and evident.

I repent and ask forgiveness for all my sins
Of which I am aware or not aware.

O Allah!
You are the Knower of all things unknown
And the Veiler of disgrace,
The Forgiver of sins.

There is no power or strength besides
Allah, the Exalted, The Supreme.

-----------------------------

I bow to You, O God,
Who appears in the astonishing form of Narasimhadeva,
half man and half lion.
For Your ever joyful devotee Prahlad, You are the source of joy.
Your fingernails are just like chisels
on the stone-like chest of the demon Hiranyakashipu.
Nrisimhadeva is here and Nrisimhadeva is there.
Wherever I may go, Lord Nrisimhadeva is there.
Lord Nrisimhadeva is far away on the outside,
but He is also in my own heart.
I surrender to Lord Nrisimhadeva,
who is the Origin of everything and the Supreme Shelter.

-----------------------------

I find you, Lord, in all things and in all
my fellow creatures, pulsing with your life;
as a tiny seed you sleep in what is small
and in the vast you vastly yield yourself.

-----------------------------

I lift these hands, dear God, to You,
in praise and thanks for all you do.
You light the path through all my days
and bless me with your loving ways...

I lift these hands dear God, to You,
in troubled hours when joys are few.
You bear me up on eagles'wings and see
me through each test life brings.

I lift these hands, dear God, to You,
please grant me wisdom, patience, too.
Then fill my heart with love and caring,
precious gifts you've made for sharing.

-----------------------------

I see no stranger, I see no enemy
Wherever I look, God is all I see

I don't think of us and them
No one do I hate or condemn
I see God's image – each one a friend.

Of any religion, caste or race
All I see is God's shining face
His smiling face, His gracious face.

Accept as beautiful all His design
I learnt this truth in sangat divine

One Word resounds in me and you
Waheguru ... Waheguru ...
In him, in her, in me and you
Waheguru ... Waheguru ...

Beholding in every being His light
I bloom like a flower in joy and delight.

-----------------------------

I shall breathe
the sweet breath
Which comes forth from Thy mouth.
I shall behold
Thy beauty everyday.
It is my desire that I may hear
Thy sweet voice,
Like the North Wind,
That my limbs may be quickened with life
Through love of Thee.
Give me Thy hands,
Holding Thy spirit,
That I may receive it,
And may live by it.
Call Thou upon my name throughout eternity,
And it shall never fail.

-----------------------------

I think over again my small adventures, my fears,
These small ones that seemed so big.
For all the vital things I had to get and to reach.
And yet there is only one great thing,
The only thing.
To live to see the great day that dawns
And the light that fills the world.

-----------------------------

Lord, you are my lover,
My longing,
My flowing stream,
My sun,
An I am your reflection.

-----------------------------

Make a joyful noise unto the Lord, all ye lands.
Serve the Lord with gladness;
come before his presence with singing.
Know ye that the Lord he is God;
it is he that hath made us, and not we ourselves;
we are his people, and the sheep of his pasture.
Enter into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into his courts with praise;
be thankful unto him, and bless his name.
For the Lord is good; his mercy is everlasting;
and his truth endureth to all generations.

-----------------------------

Most High, all-powerful, all-good Lord, All praise is Yours, all glory, all honor and all blessings. To you alone, Most High, do they belong, and no mortal lips are worthy to pronounce Your Name.

Praised be You my Lord with all Your creatures, especially Sir Brother Sun, Who is the day through whom You give us light. And he is beautiful and radiant with great splendour, Of You Most High, he bears the likeness.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Moon and the stars, in the heavens you have made them bright, precious and fair.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s Wind and Air, And fair and stormy, all weather's moods, by which You cherish all that You have made.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Water, So useful, humble, precious and pure.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Fire, through whom You light the night and he is beautiful and playful and robust and strong.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our Sister, Mother Earth who sustains and governs us, producing varied fruits with coloured flowers and herbs. Praise be You my Lord through those who grant pardon for love of You and bear sickness and trial. Blessed are those who endure in peace, By You Most High.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Death, from whom no-one living can escape. Woe to those who die in mortal sin! Blessed are they She finds doing Your Will. No second death can do them harm. Praise and bless my Lord and give Him thanks, And serve Him with great humility.

-----------------------------

My Lord God,

I have no idea where I am going
I do not see the road ahead of me.
I cannot know for certain where it will end.

Nor do I really know myself,
And the fact that I think I am following
your will does not mean that I am
actually doing so.

But I believe that the desire to please
you does in fact please you.
And I hope that I have that desire in all
that I am doing.
And I know that if I do this, you
will lead me by the right road
though I may know nothing about it.

Therefore will I trust you always
though I may seem to be lost
and in the shadow of death, I will
not fear, for you are ever with me
and you will never leave me
to face my perils alone.

-----------------------------

My soul doth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th rejoiced in God my Saviour.
For he hath regarded
the lowliness of his handmaiden.
For behold, from henceforth
all generations shall call me blessed.
For he that is mighty hath magnified me
and holy is his name.
And his mercy is on them that fear him
throughout all generations.
He hath shewed strength with his arm
he hath scattered the proud in the imagination of their hearts.
He hath put down the mighty from their seat
and hath exalted the humble and meek.
He hath filled the hungry with good things
and the rich he hath sent empty away.
He remembering his mercy hath holpen his servant Israel
as he promised to our forefathers, Abraham and his seed, for ever.

-----------------------------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handmaid's lowliness;
behold, from now on will all ages call me blessed.
The Mighty One has done great things for me, and holy is his name.
His mercy is from age to age to those who fear him.
He has shown might with his arm,
dispersed the arrogant of mind and heart.
He has thrown down the rulers from their thrones
but lifted up the lowly.
The hungry he has filled with good things;
the rich he has sent away empty.
He has helped Israel his servant, remembering his mercy,
According to his promise to our fathers,
to Abraham and to his descendants forever.

-----------------------------

Oh Almighty! Life is oblation!
We offer all fruits of duty to you.
Kindly concede!
We surrender everything to you!
Oh Almighty! May there be a Peace! Peace! Peace! Everywhere.

-----------------------------

You alone are God,
You were from of old,
And You will be until eternity, always, first and last,
Now and always for ever and ever.
As for You, You are the same,
and Your epoch will not come to an end;
As for You, You are the same,
and Your kingdom will not be abolished,
And Your Power is invincible,
And Your strength is untiring,
And Your magnificence will not be humbled,
And the splendour of Your Name will not be dispelled,
and the praise of Your exalted fame will not be diminished,
And Your light will not be darkened,
And Your decree will not be abrogated,
The pillar of Your word will not be overthrown,
And Your wisdom will not fall into error,
And Your counsel will not be concealed.
You alone are God, God of all;
You alone are God, Lord of all;
You alone are God, King of all;
You alone are God, Creator of all;
You alone are God, Conqueror of all;
You alone are God, Omnipotent;
You alone are God, Slayer of all;
You alone are God, Destroyer of all;
You alone are God, Saviour of all;
You alone are God, Life of all;
You alone are God, Sustainer of all;
You alone are God, Protector of all;
You alone are God, Restorer of all;
You alone are God, Raiser of all;
You alone are God, Supporter of all;
You alone are God, Helper of all;
You alone are God, A righteous God over all creation.

-----------------------------

You are the peace of all things calm
You are the place to hide from harm
You are the light that shines in dark
You are the heart's eternal spark
You are the door that's open wide
You are the guest who waits inside
You are the stranger at the door
You are the calling of the poor
You are my Lord and with me still
You are my love, keep me from ill
You are the light, the truth, the way
You are my Saviour this very day.

-----------------------------

You are holy, Lord,
the only God,
and Your deeds are wonderful.
You are strong.
You are great.
You are the Most High.
You are Almighty.
You, Holy Father are King of heaven and earth.
You are Three and One, Lord God, all Good.
You are Good, all Good, supreme Good, Lord God, living and true.
You are love.
You are wisdom.
You are humility.
You are endurance.
You are rest.
You are peace.
You are joy and gladness.
You are justice and moderation.
You are all our riches, and You suffice for us.
You are beauty.
You are gentleness.
You are our protector.
You are our guardian and defender.
You are our courage.
You are our haven and our hope.
You are our faith, our great consolation.
You are our eternal life, Great and Wonderful Lord, God Almighty, Merciful Savi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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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아주 오래전 시계는 고가품의 하나로 시계를 차는 사람은 부유한 계층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누구나 시계를 차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루에 몇번이나 시간을 볼까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헬라어에는 시간(때)을 두가지로 표현한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요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순간,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있는 순간이다. 카이로스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성경 속 969세를 산 므두셀라의 시간이 크로노스였다면 33년의 짧은 생애동안 위대한 삶을 산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카이로스였다고 할 수 있다.

    임신부가 임신한 후 열달동안 아이를 복중에 간직하고 있다가 아이를 낳았다고 할 때 그 열 달은 흘러가는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이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아이를 잉태하는 바로 그 순간,즉 산모의 생명에 대한 기쁨과 다 이루었다는 안도의 평온함을 갖는 순간이 곧 ‘카이로스’이다.

    얼마전 대선을 위한 후보문제가 화두가 되엇던 때가 있었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저마다 자기들의 업적을 주장하고 자기들이 집권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즉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보냈다는 것이다.

    역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 의미가 있다. 그때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교과서에서 다 알 수 있다. 그것은 크로노스적 시간이해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속에 사는 사람은 비록 ‘그 때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다하여도‘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철새처럼 이리저리 양지를 좇아가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모른다. 그들은 카이로스적인 살아있는 정신들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부정과 불의, 투쟁과 타협, 전쟁과 싸움, 가난과 억압 등의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 지에 관심이 없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추하며 사는 사람이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ology와 관련되는 것으로 연대기란 뜻이다. 순차적인 역사를 말한다. 고려시대, 조선왕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분단시대, 이렇게 연대기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이해하는 관점을 chronology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늘은 21세기 초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카이로스 역사관은 질적으로 다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의 연대성 안에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야 함을 지시한다고 하겠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끝이 없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 마지막이 있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를 일컬어 파루시아라고 한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Para와 ousia가 결합된 말로서, Para는 "along side" 즉 '나란히' 라는 뜻이고 ousia는 "substance" 즉 '본질 혹은 실재'란 뜻이다. 이 두 단어를 결합한 뜻은 '본질과 나란히 온다'라는 뜻이다. 즉, 파루시아는 "실재로서 오시는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영적 임재를 믿는 것처럼 그 날에 몸으로(bodily) 혹은 육체적으로(physical)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실재적 사건이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하게 될 재림을 의미하는 이 종말론적 단어는 예수께서 종말에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파루시아의 도래 앞에 놓여있다. 아무도 그날의 심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우리를 향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언제나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짐승의 이빨 앞에서도, 불타는 기둥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으로 잴 수 없는 파루시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니었다. "심판의 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무소유의 삶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말 중에 꼬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결코 "사람 앞에 서 있는 이"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오늘을 종말처럼 산다. 날마다 순간마다 파루시아를 느끼며 살기에 결코 주어진 시간을 탕진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질곡에서도 파루시아에 대한 대망은 그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으로 다잡아 놓으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망이 있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고 말한 바 있다. 파루시아는 실재할 것이기에,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믿음의 길과 기다림이 세상의 눈으로는 미련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을 책임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power)이 되며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 즉 파루시아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살지만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다. 누구나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에게는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시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http://lord.kehc.org) 목사 박찬희



Chronos and Kairos

Fr. Patrick Reardon

Whereas English has only one word for time, other European languages more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time as instance ("How many times?") and time as sequence ("How much time?").

The ancient Greeks, who thought a great deal about time (among many subjects), also had two different words that we English-speakers are forced to translate with the single word "time." Since there is a very profound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words, and because time is an important theological subject in the New Testament (itself written in Greek), it is useful to examine this difference.

The first Greek term is chronos, meaning time on the move, time as before and after, time as the future passing through the present and so becoming the past. From this Greek word chronos we derive such English terms as chronic, chronicle, and chronology. Thus, we call an illness chronic if it lasts a long time. A chronicle is an account of events through a sequence of time. Chronology is the itemized, studied measurement of time.

Indeed, measurement is one of the distinguishing characteristics of chronos, which is a quantitative concept. Time that cannot be measured is not chronos. Time in this sense is dimensional, quantifiable; it can be "accounted for."

It is very important, moreover, to measure chronos in order to give it identifiable shape, to gain imaginative and rational control over it, because chronos is otherwise wild and destructive. The Greeks believed it ate its children. Chronos, you see, is sort of crazy. It is not only dimensional; it readily becomes demented.

Indeed, time does not truly exist in the way that other familiar things exist. I cannot hear it. It has no fragrance. I can't point to it and say, "Aha, there it is. Don't let it get away!" Time in a sense is terribly close to non-existence. After all, chronos deals with the past and future, neither of which has real existence.

No wonder, then, that chronos is so difficult to measure. I mean, how do we enclose time and say, "hey, stand still, you, so we can size you up." The only way to measure time, in fact, is by some arbitrary reference to space, and we normally use spatial prepositions with respect to it, such as the earth's journey around the sun, or the shadow's daily progression across a sundial, and the cockcrow through the night.

Now chronos, because it is made up of some things that don't exist anymore and other things that don't yet exist, is a true image of non-existence, a veritable icon of death. In fact, only dead time can be measured. Moreover, chronos is, in this respect, rather ghoulish. Even dead, it continues to feed on us. We may speak of "killing time," but it invariably ends up killing us. Chronos is, therefore, an image of everlasting death, what the Bible calls the "bottomless pit," or hell. What is hell but the reign of death in ongoing, unending sequence?

In addition to chronos, however, the Greeks also spoke of time as a moment, time as occasion, time as qualitative rather than quantitative, time as significant rather than dimensional. This second word for time is kairos.

Strictly speaking, we don't measure kairos. We don't ask someone, for example, "How much Christmas did you have?" We inquire, rather, "what sort of Christmas did you have?" With kairos we employ the category of qualis, not quantum.

The reason that time in the sense of kairos cannot be measured is because it is always a now. A now is obviously indivisible; an instant is, so to speak, too brief to account for. By the time you stop to measure a now, it is already gone. Now is punctuated by a swift, indecipherable passage from this to that. Furthermore, if now cannot be measured, it can also not be counted. It is futile, for example, and probably a threat to sanity, to ask how many nows there are in an hour.

Unlike the past and the future, nonetheless, the now really exists. Indeed, now is the only time that does exist. In the strictest sense, "there's no time like now."

Kairos, because it is present, is an icon of eternal life. To experience the now, after all, one must be alive. The dead know nothing of now. Therefore, the now, the kairos, is an icon of the life of heaven. Indeed, eternal life is an everlasting now, in which there is no sequence, no before and after.

Eternity is not a long time. Strictly speaking, there is simply no length to it. Nothing elapses. The infinite is not measurable. Thus, "when we've been there ten thousand years/ bright shining as the sun/ we've no less days to sing God's praise/ than when we've first begun."

Here on earth, kairos is time as significant and decisive. This is the time of which St. Paul speaks in 2 Corinthians 6:1--"In a favorable time (kairo dekto) I heard you, and in a day of salvation I have helped you. Behold, now is the most favorable time (nun kairos euprósdektos); behold, now (nun) is the day of salvation." The only time we can ever really seize is the now. Now is the present instant, the marked pulsing of the heart, the moment to lay hold on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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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이 되라

 

너를 기뻐하라

하나님이 지으신 너를 기뻐하라

아무리 형편없어 보여도

그 모습을 기뻐하라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을 기뻐하라

 

네 한계를 인정하라

네 무능력을 인정하라

네가 죄인임을 인정하라

영원히 너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라

 

네 노력 네 인내 네 지혜에 의지하지 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미 치러진 무한대의 희생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하라



(30년 이상 나의 좌우명이자 우리집 벽에 붙어있는 2개 가훈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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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에스겔 22:30-31]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절망과 굶주림에 갇힌 저들은 내 마음의 오랜 슬픔

나는 이제 일어나 저들의 멍에를 꺽고 눈물 씻기기 원하는데

누가 내게 부르짖어 저들을 구원케 할까

누가 나를 위해 가서 나의 사랑을 전할까
나는 이제 보기 원하네 나의 자녀들 살아나는 그 날
기쁜 찬송 소리 하늘에 웃음 소리 온 땅 가득한 그 날


(우리집 벽에 붙어있는 2개 가훈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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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필수은사, 신유는 최고은사인가?


동영상 보기: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7097674663101001039#docid=-3289344538001077510

(대구 동신교회 권성수 목사)

내용요약:
방언 : 방언은사는 필수은사가 아님. 모든 사람이 다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님.
         D.L. 무디 목사, 옥한흠 목사 등 세계적인 영적지도자들 중에도 방언을 못하는(안하는) 분들 많았음.
         권목사 자신도 방언을 못함. 자신에게는 다른 더 큰 은사들 있음.
         또한 가짜방언 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많음 (마귀방언, 최면술방언).

                  
         반드시 교회에 덕을 끼치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함.

         방언의 동기는 반드시 사랑이어야.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사용되어야. 사랑이 최고의 방언임.
         결코 자랑하기 위해서 해서는 안됨.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해서는 안됨.
         다른 사람들이 듣기 아주 거북한 방언은 하지 말아야. (이상한 소리, 짐승 소리, 악령의 소리 등등) 
         
         특수한 경우지만 실제 외국어(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등) 방언도 있음.

         방언 통변의 은사도 실제로 있지만 가짜가 무지하게 많음.

신유 : 신유(치료)의 은사는 최고의 은사가 아님. 가짜 신유은사도 엄청나게 많음.
         받았더라도 굉장히 어려운 일임. 치료를 위해 기도를 하고 나면 자신의 힘은 다 빠져 나감.
         100% 다 치료되지도 않음. 대체로 10%정도 치료된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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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비기도(거룩하고 성결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기억나는 모든 죄 날마다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기/ 거룩한 기도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날로 거룩해 지는 삶을 위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죄악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기도 도우심 기원) /10-30분 정도

2) 신의영광/ 신의뜻/ 신의나라/ 무한감사 (찬양의기도)/10-30분 정도

3) 고문당하는 사람들/조난자들/자살하려는 사람들/오늘새벽사형수들/정치범들/
북한교도소 재소자들/동남아 인신매매 성노예 소녀들/아프리카 남수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역의 기근과 전쟁/유럽교회의 회복

4) 세상이 음란의 죄에서 벗어나도록 (전세계, 한국, 나자신/ 마음으로 몸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성적인 타락에서 벗어나게/ 마음과 육체를 더럽히지 않도록/ 성적인 유혹과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날마다 닮아 가도록)

5) 아프리카(기아,전쟁,고문,인종말살,가뭄,선교)/ 회교권의 회개/ 중동/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인도,파키스탄/ 미얀마/ 동남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뉴기니/ 호주/ 뉴질랜드/ 중국/ 북한/ 한국 (동서화합, 여야대화, 미움 대신에 사랑, 경제회복)/ 유럽/ 시베리아/ 북미/ 남미/ 태평양섬들/ 인도양섬들/ 대서양섬들/ 남극/ 북극/ 히말라야/ 전세계의 사막지역

6) 루게릭병환자들/ 암환자들/ 에이즈환자들/ 나환자들/ 각종희귀병환자들 및 그 가족들

7) 소년소녀가장들/ 미아들/ 고아들/ 학대 받는 아동들/ 낙태되는 아이들

8) 독거노인들

9) 지체장애자들 (시각장애자/ 지체부자유자/ 각종신체질환자들)

10) 정신장애자들 (정신적인 문제로 깊이 갈등 하는 사람포함)

11) 노숙자들 (일용할 양식 공급되게/거처 공급되게)

12) 실업자들 (청년,중년)

13) 매맞는 여자들

14) 탈북자들

15) 어려움에 처한 동식물들

16) 지구의 환경보존

17) 각 교회 목사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 그들을 통한 성령의 역사

18) 가족 (친가,외가,처가)

19) 직장 사람들

20) 동창,동기들 (초등, 중등, 고등, 대학 등)

21) 교회 환우들

22) 전세계 교도소 재소자들 (회개,성공적인 갱생,남을 돕는 삶으로 거듭나기)

23) 지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찬양 들려주기

24) 기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25)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및 사랑고백/감사 

모든 중보 기도에는 공통적으로,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기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그 지역에 있는 교회를 위한 기도,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가 들어가도록 합시다.
 
모든 기도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각 나라별로, 지역별로, 개인별로, 상황별로 일일이 이름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부르면서 하고, 통으로 대충 한꺼번에 하지 않도록 합시다.

(위의 기도목록은 2002년 9~10월 경에 작성되고 이후 약간씩 보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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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형 크리스천

문봉주 지음

두란노/2004년 1월/288쪽/10,000원

 

▣ 저 자 문봉주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서 동북아1과장, 주 중국 공사, 아태국장, 뉴질랜드 대사, 주미 정무 공사 등을 역임하고 현재 본부 대사로 있다. 국내외 교회에서 ‘성경의 맥을 잡아라’와 이 내용을 심화한 ‘체험하는 성경의 맥’ 성경 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다.

문봉주 집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재주가 있다. 아태국장, 뉴질랜드 대사, 주미 공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라는 간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공직 생활 가운데서도, 어느 성도 못지 않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하늘나라 대사라는 신분 때문이다. 그는 해외에 있든 국내에 있든 새벽 기도로 하루를 열고, 개인 시간 대부분은 ‘체험하는 성경의 맥’이라는 성경 공부 모임을 준비하고 인도하는 데 쏟아 붓는다. 평신도들은 물론 목회자들까지도 긴장하게 만들만큼 열정적인 하나님의 사람이다.

▣ Short Summary

문봉주 대사가 삶의 현장에서 깨달은 인생의 불황에서 일어나는 법! 말씀은 인생의 핸들이다! 기도는 인생을 움직이는 동력 전달 장치이다! 새벽 기도는 문제 해결의 운동력이다! 새벽 기도로 일어나라!

 

이 책은 저자가 모태 신앙이었으나 마흔두 살이 넘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슴으로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고 위암 4기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말씀과 기도의 은사를 받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까지의 기록을 찬찬히 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간증의 형식을 띠고 있어서 읽기 쉬우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구체적 매뉴얼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런 탓에 이 책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말씀과 기도로 생활하는 지은이의 강력한 영성에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새벽형 크리스천으로 변하고야 말리라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 체험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인생의 불황과 믿음의 방황을 끝내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쯤은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왜 인생이 이렇게 힘들고 고달팠는지,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없었는지, 말씀을 잘 아는데도 내 손과 발이 주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쉼 없는 말씀 묵상과 기도로 새로운 힘을 성령님께 공급받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거듭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은이가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는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인 '새벽 기도'로 하루를 여는 이유이며, 우리에게 새벽 기도를 강권하는 이유이다.

 

▣ 차례

프롤로그 - 나는 어둠형 인간이었다

 

1부 말씀은 인생의 핸들이다

1장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이유

2장 말씀을 배우는 삶

3장 말씀 먹기의 즐거움

4장 실전! 말씀 먹기

 

2부 기도는 인생을 움직이는 동력 전달 장치다

1장 기도가 어려웠던 이유

2장 기도 훈련

3장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의 즐거움

4장 실전! 기도

 

3부 새벽 기도는 문제 해결의 원동력이다

1장 새벽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

2장 새벽 기도의 신령한 축복

3장 응답받는 새벽 기도

4장 실전! 새벽 기도

 

프롤로그 - 나는 어둠형 인간이었다

삶 속에 슬며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인지 졸업 무렵인 1970년대 초반인지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어둠이란 놈은 ‘아차’ 하는 순간, 내 멱살을 잡아채기 시작해서 어느 틈에 아예 내 위에 걸터앉아 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주 순순히 그놈의 술책에 넘어가 주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왜 이제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냐는 듯 그놈을 껴안고 뒹굴기 시작했다. 그놈은 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머니가 뱃속에서부터 심어 준, 외할머니와 이모가 함께 길러 낸 20여 년 동안의 신앙심은 그렇게 내 마음밭에서 뽑혀져 나갔다.

 

내 어린 시절은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겠다며 바닷가 뱃전을 전전하던 때였고, 어머니는 다른 곳에서 지내셨다. 나는 어머니가 걸어 올라오시던 길 어귀에서 한참을 서성거리기 일쑤였다. 누이와 나는 단둘이서 창신동 하늘 높은 데 있는 판잣집을 지켰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우울 증세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그것이 지금도 참 신기하다. 늘 자신만만했고 삶의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성격이 그렇게 낙천적이었던 것은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기타를 배우게 되었던 나는 얼마나 깊게 빠져들었던지, 그룹사운드까지 조직해서 휴학을 하고 연주활동을 할 정도였다. 뒤늦게 그 길에서 돌아서 고3으로 복학했을 때는 열등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에 박차를 가해 당당히 서울대 외교학과에 합격했다. 내 꿈은 고1때부터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재상이 되기 전에 외교관이었다는 것을 알고 외교관이 되겠다고 작심한 터였다. 다행히 대학 졸업 무렵 곧바로 외무 고시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의전 비서실에서 파견 근무를 하고, 그 후 외무부 동북아1과장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얼마나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는지, 그야말로 기고만장해서 밤만 되면 강남 술집들을 주름잡는 생활을 했다. 나는 능력과 젊음과 호기로 치장된 사내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술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술을 끊는다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과 세상적으로 놀아나는 데 탁월함을 발휘할수록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 가운데서도 주일을 지킨다든가 십일조를 한다든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든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생활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교회에서 집사 직분도 받았고, 봉사가 필요하다면 선뜻 순종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신앙의 습관은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저 세계를 움직이는 하나님은 계신다는 단순한 믿음에서였다. 나는 이처럼 한번 붙잡힌 가슴속 어둠에서 여전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제1부 말씀은 인생의 핸들이다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이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어느 주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날 아침도 교회에 가려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물론 여느 주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내 몸에서는 지난밤의 술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나서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술 냄새 나니까 입 다물어욧!” 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커다란 돌문 같은 것이 내 머리를 콱 찍어누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불교 신자였던 아내가, 나를 따라 교회를 다녔을 뿐인 아내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가증스러운 입을 제발 다물라고 말하는 거였다. 아내는 하나님을 대신해 화를 내고 있었다.

 

사실 그 즈음 나는 외무부에서 엘리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워싱턴 주미 대사관에 부임할 차례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워싱턴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로 발령이 나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가 정말 크리스천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은 그때를 빌어 내 마음에 믿음의 씨앗 하나를 심어 주셨다. 이제부터라도 좀 크리스천답게 살아야겠다는 소망을 심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고, 그것을 믿게 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이때 우리가 내어 드릴 수 있는 공간은 겨자씨 만한 공간밖에는 되지 않는다. 마음이 온통 세상 의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 속에서 주님은 일을 시작하신다. 마침내 그분은 조용히 내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한 알의 작은 씨앗 같은 소망을 품게 하셨다.

 

파리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가는 스위스 에어라인을 타면서 그렇게 즐기던 일본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짤막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변화시켜 주시려면 담배를 끊게 해 주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차례 시도에도 끊을 수 없던 것이, 제네바에 도착한 뒤로는 담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제네바라는 도시가 10시 이후에는 조금만 시끄럽게 굴어도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 정도로 밤 문화 환경이 술과 담배를 끊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변화시키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말씀을 배우는 삶

제네바에서 나를 환영하는 저녁 약속이 잡힌 날 낮에 진지하고 성실해 보이는 참사관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퍼뜩 스위스로 출발하기 전에 어느 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제네바에 가면 재무부에서 나온 참사관이 있을 거예요. 엄낙용(후에 재경원 차관과 한국산업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집사님이라고요. 아주 신앙이 좋은 분이니 그분한테 많이 보고 배우세요.” ‘바로 이 사람이구나!’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는 결심으로 가득 차 있던 나로서는 이분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 날로 우리 부부는 엄 집사님과 세 가정이 모여서 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 합류했다.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한 뒤로 나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열정과 기쁨에 휩싸여 그날을 기다리곤 했다. 나는 엄 집사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는 당시 스위스에 유학 와 있던 청년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많은 도전을 받은 나는 성경 공부에 더욱 열심을 냈다. 하루는 엄 집사님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면서 내게 자신이 이끌던 유학생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모임을 이끌던 중 칼뱅의 예정론도 제대로 모르는 나의 무식함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성경에 대해 어지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무렵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내 결심에 불을 당긴 책 한 권이 있었다. 김성일 권사의 『성경대로 살기』라는 책이었는데, 읽을수록 글쓴이의 폭넓은 성경 지식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 대단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저자 약력을 들춰보니 웬걸, 한 대기업의 중견 간부이자 『땅끝에서 오다』라는 소설을 썼던 평신도였다. 그 책에서 김성일 권사는 “나도 성경을 잘 몰랐는데, 예상치 않은 아내의 암 선고를 접하고는 말씀을 급히 먹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서둘러 신을 신고,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짚고 유월절 음식을 먹었듯이 나도 그렇게 체할 정도로 급히 말씀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말씀을 먹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제네바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나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다. 온누리교회에서는 거의 매일 밤 성경 공부 세미나가 열렸다. 그 당시 하용조 목사님은 ‘말씀을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하라’고 시도 때도 없이 말씀하셨는데, 나는 가르칠 군번이 안 되니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토요일 오후만 되면 두란노서원을 찾았다. 성경에 관해서라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책별 강의는 물론이고 중보 기도 같은 신앙 성장과 관련된 세미나도 쫓아다녔다. 몸은 비록 힘들고 피곤했지만, 주님이 새롭게 부어 주시는 은혜 가운데 저녁마다 성경 공부를 해 나갈 수 있었다.

 

말씀을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변화된 크리스천으로서 삶을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구 불타올랐다.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들릴라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했다. 그때 한창 온누리교회에서 강조하던 것은 새벽 기도였다. 하 목사님은 새벽 기도가 개인의 신앙 성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자주 설교하셨다. 나는 그 권면에 순종하기로 했다. 항상 밤늦게 잠을 자던 내게는 대단한 무리였으나 새벽 기도로 내가 정말 변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강행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진짜 맞았다. 하루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졸린 눈을 부비면서 예배당 밖을 빠져나가는데 낯익은 사람과 딱 부딪혔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와 함께 강남 술집을 주름잡던 외무부의 소문난 한량 김광동 심의관이었다. 강남의 한량 둘이 새벽에 예배당에서 꽝 마주쳤으니 서로 얼마나 놀랐겠는가. 혼자 하기 힘드니까 같이 하라고 하나님은 동역자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만나서 서로의 다이어리에 저녁 성경 공부 스케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1995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중국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경제 공사였고, 나는 정무 공사였다.

 

말씀 먹기의 즐거움

중국에 있으면서 김광동 심의관과 나는 북경한인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하루는 담임 목사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청년부 성경 공부를 맡아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만 앞이 깜깜해졌다. 많이 배웠던 것은 사실인데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문제를 놓고 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릴 때 주님은 영감을 주셨다. ‘성경의 맥을 잡는’ 성경 공부! 이 방법이야말로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되었으나 말씀을 읽기 어려워하는 평신도들에게는 꼭 필요한 성경 공부니까, 북경한인교회 청년부에게도 아주 유용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청년들은 대환영이었다. 말씀을 그렇게 사모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는가. ‘성경의 맥’을 잡아가는 데 무려 8개월이 걸렸다. 어느 날 함께 공부하던 청년 하나가 내게 카드 한 장을 건넸는데 그 안에 “함께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났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가장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을 전하시다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니….’ 사실 나는 늘 가슴 한 곁이 허전했었다. 기도를 하는 순간에도 ‘나’를 의심했다. 나 같은 위선자가 하나님을 사랑해도 되는가. 그런 불안 한가운데 있는 나를 주님은 안아 주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대사관에 나를 찾는 손님이 한 분 오셨다. 아들 비자 문제로 찾아온 중국인 의사였는데, 비자를 받을 수 있게 해드리자 고맙다면서 내 건강에 대해 몇 마디 묻더니 무조건 자기 병원으로 와서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다음 날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받은 나는 며칠 후 위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나는 믿을 만한 친구 한 사람에게만 말하고 휴가를 얻어 급히 서울로 향했다.

 

아내는 자신의 감정 따위는 모조리 숨기고 아픈 자식을 위로하듯이 나를 대했다. 나는 그때 아내가 얼마나 커 보였는지 모른다. 서울대학병원에서도 진단 결과 위암 4기였다. 아내와 마로니에 공원 근처의 한 카페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때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창밖을 보면서 나는 그야말로 ‘창조주’를 생각했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했다면…, 그랬다면 40대 중반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내 앞에 마주 앉은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에게 제일 미안했다.

 

시편 23편 말씀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니는 동안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셨다. 하나님은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러나 중국으로 돌아와 항암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나는 영육간에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을 헤맸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가도 주님께 나를 드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외교관이라는 탄탄한 세상의 직업과 학력과 가정….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이 생명마저도 원래의 주인에게 모두 되돌려 주어야 했을 때, 내게는 정말 하나님을 찾는 영혼의 소리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나는 말씀을 붙잡고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와중에도 청년부 성경공부 인도 때문에 구약 성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 말씀이 신약 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그와 관련된 신약 성경 구절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아닌가! 성경 구절들이 가슴속에 프린트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목사님 설교 내용까지 머릿속에 고스란히 기억나는 거였다. ‘아! 이것이 말씀의 은사로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외워지지 않던 성경 구절이 몇 번만 보면 척척 마음 한가운데 새겨지는데, 신구약 성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말씀의 행간을 읽는 눈도 그때 열렸다. 그때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나는 그 놀라움과 감격으로 항암 치료의 고통을 이겨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시간을 축복의 시간으로 바꿔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내 생명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의 선물(말씀의 은사)을 허락하신 것이다. 정말 고난은 내가 전에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축복의 시작이었다.

 

실전! 말씀 먹기

얼마 뒤 내가 새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아태국장이라는 중직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것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을 때 주님이 주신 축복의 실체였다. 나는 한국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성경의 맥을 잡아라’를 7개월 과정으로 열었다. 또 이 성경 공부가 끝날 즈음에는 온누리교회에서도 그 과정을 열었다. 500명 정도로 시작한 것이 천 명을 넘어설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성경을 제일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말씀을 배우는 데서 그쳤다면 지금의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

 

 

제2부 기도는 인생을 움직이는 동력 전달 장치다

기도가 어려웠던 이유

처음 하나님을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할 무렵 하루는 설교 시간에 성도라면 하루에 한 시간은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이 귀에 들어왔다. 나는 앞이 깜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나는 단지 잠자리에 들기 전과 식사하기 전에 습관처럼 잠깐 감사와 회개 기도를 되풀이하는 게 고작이었다. 교회에서도 개인기도 시간이 되면 나는 5분, 10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는데 옆에서는 통곡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나라 말, 그러니까 방언 기도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어찌나 막힘 없이 기도들을 잘하던지.

 

나는 그때부터 말씀을 배우러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기도 세미나란 세미나는 마구잡이로 쫓아다니고, 기도에 관련된 책을 뒤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는 말씀과는 달랐다. 기도는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행의 차원이었던 탓일까. 나도 눈물 콧물 쏟아가면서 기도하고 싶다는 것, 그때의 유일한 내 소망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소망의 깊이가 더하면 더할수록 기도란 배워서 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만 확실해졌다.

 

내 기도가 너무 형식적이라서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중 나도 금식기도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추풍령에 있는 용문산기도원으로 정했다. 그러나 막상 금식을 시작하고 보니, 웬걸 외워지기는커녕 배가 고파지면서 정신만 사나워졌다. 이튿날 나는 참다못해 시간 때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한테 3일 금식기도 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왔으니 끝까지는 마쳐야 했던 것이다.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내려가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마침 영화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금도 내가 금식기도 하러 갔다가 영화보러 나간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배꼽을 뺀다.

 

기도 훈련

한참 말씀을 배우면서 새벽 기도를 다니던 때, 김광동 심의관과 나는 목요일 새벽에는 어김없이 두란노서원에서 열리던 TIM 선교회 중보기도 모임으로 향했다. 하용조 목사님도 꼭 참석하시곤 했다. 하루는 기도 모임을 끝마쳤는데, 하 목사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서 일어났다. “TIM 기도 모임을 인도하시던 도육환 목사님이 스리랑카 선교사로 파송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이 모임을 문 집사님이 인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해 주실 거죠?”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혼자 기도하는 것도 벅차하는 사람인데 기도 모임을 이끌라니. 결국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제의를 수락하고 말았다. 그 기도 모임 리더를 맡았던 8개월 동안이야말로 내게는 처절하리만큼 고통스러운 기도 훈련의 시기였다. 나는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가 하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목사님, 저 정말 기도 못하겠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하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기도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목사님 말씀에 따라 기도의 영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기도는 어려웠다. 한 달 뒤에 또 여쭸더니 이번에는 기도 줄을 잡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빨랫줄도 아니고 철사 줄도 아니고 기도 줄이 대체 뭐냐’ 하는 심정이었다. 목사님께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착실한 기도 생활을 했다. 때로는 ‘내 기도가 외식하는 자의 기도가 아닌가’ 하는 부담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중국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중국이었는데도 나는 기뻤다. 그 기도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중국으로 가는 것도 좋았던 것이다.

 

중국에 와서는 새벽기도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 암 수술을 받게 되었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나도 모르게 기도 줄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렵게 이어져 온 기도 줄이었는데. 나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수도 없이 내리꽂히는 도끼날 같은 고통에 치를 떨어야 했고 쪼개질 듯 쪼개지지 않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울면서 부르짖고 싶었고 무릎꿇고 싶었다. 그러나 외마디 소리만 나올 뿐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기도란 평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은 갑자기 힘든 상황이 닥쳐도 기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기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 1:10). 여기에서 사탄이 말하는 산울이란 바로 기도의 울타리, 즉 천사의 울타리를 말한다. 사탄은 욥을 치고 싶어도 그 천사의 울타리 때문에 칠 수 없으니 그걸 잠깐 치워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천사의 울타리를 둘러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나의 공관장으로서 첫 부임지를 뉴질랜드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제일 적합한 곳으로 보내 주신 것이다. 우선 뉴질랜드는 자연환경이 건강을 회복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그리고 한국 이민이 시작되어 40여 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졌던 때라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웰링턴과 오클랜드를 오가면서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그렇게 8개월쯤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좋질 않았다. 혹시 암이 재발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니, 몸과 영혼이 완전히 다운되었다. 하나님께 물었을 때 뭔가 희미하게 짚이는 게 있었다. 어느 새 내 마음에 영적 교만이 싹트고 있었다. 아무리 말씀으로 충만하다 한들 기도가 없다면 결국 영혼이 병든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중보 기도의 위력도 실감했다. 생각해 보니, 예전 중국이나 한국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늘 성도들의 중보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갈급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던 중, 당시 뉴질랜드에서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로 활동하던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 충만한 설교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그분의 저서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두 권을 챙겨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 책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분이 30년 동안 혼자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깨달아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한 것이었다.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에 그 책을 정말 단비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그 책에서는 성령 충만한 삶이란 순간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성령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내 전인격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찰스 스탠리 목사님은 말했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일뿐이라고…. 결국 말씀과 기도와 훈련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찰스 스탠리 목사처럼 간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방법을 알려 주세요. 제게도 증거를 보여 주세요.”

얼마 뒤 나는 예언 은사를 받은 여자 집사님을 뵐 기회가 생겼다. 그분은 대뜸 내게 방언기도를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니라고 말했고 곧 이어 그분과 나는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혀가 나도 모르게 움찔대며 춤을 추었다. 방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삽시간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함께 기도하는 중간 중간 그분이 내 방언 기도를 통역해 주셨을 때 나는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방언 기도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세밀하게 내 모든 존재의 기록들이 몽땅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모든 죄를 토해 내고 있었다. 내 힘으로 회개하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온갖 죄까지 성령님은 회개하도록 도우셨다. 무의식의 깊은 바다를 마구잡이로 휘저어 모든 것을 수면 위로 떠올리셨다.

 

더욱 더 놀라운 일은 내가 지금껏 했던 기도들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방언 기도 가운데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간절히 기도한 것도 아니고 멋도 모르고 한 기도까지도 다 나오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메마른 마음에 강력한 태풍이 몰아쳤다. 나는 처음으로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의 기도 세 시간을 마쳤을 때, 나는 그 집사님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제 일대기를 다 아십니까?” “참 놀랍죠? 점쟁이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집사님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제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한 분이시니까 그렇죠.”

 

그 뒤로 나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라는 말씀대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기도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씀의 은사를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감격에 몸을 떨어야 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때는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내 입으로 간구해 주기를 원하는 기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신변을 위한 기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의식으로는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떤 사람들도 이슬람에 속한 어떤 이들도 모두 사랑하시고 이들을 위해 누군가 기도해 주기를 원하셨다.

 

사실 내 삶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방언 은사를 받고 나서 이천수 목사님의 영성 신학을 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내가 인도하던 성경 공부도 ‘성경의 맥을 잡아라’에서 ‘체험하는 성경의 맥’으로 바뀌었다. 영성 신학은 말이 곧 영의 통로라는 말에 주목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복음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니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 나는 말씀을 받아들였는데, 실제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살아가면서 ‘말’을 조심해서 가려 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은 바로 영이 오가는 통로인 탓이다. 성령의 역사란 별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의 즐거움

내가 처음 ‘성경의 맥을 잡아라’를 강의할 때, 그 성경의 지식과 내 삶은 관계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와 말씀을 전하지 않을 때가 달랐지만, 그걸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말씀의 뒤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영이, 진리의 영이 부어지니까 지식의 말씀이 지혜의 말씀으로 바뀐 것이다. 그 뒤로는 말씀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가가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해졌다. 그야말로 ‘체험하는 성경의 맥’을 잡게 해 주신 것이다.

 

성경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가진다. 하나님은 그래서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렇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통로가 바로 말씀이다. 영이 있는 존재의 공통점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땅의 존재들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영이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영)를 불어넣으셨다. 연약한 질그릇(흙)으로 지어졌지만,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영이 임재하는 현장(생명)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사랑의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이심을 말씀을 통해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표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으며, 고통받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까지 아무 대가 없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아! 하나님은 바로 저런 분이겠구나’ 라고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방도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사람에게 세미한 음성을 통해 전달하기도 하신다. 방언을 받고 한 달쯤 지났을까… 방언 기도를 하는데, 그 뜻이 내 마음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방언이 통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마치 나와 마주 앉아 계신 듯 아주 분명하고 똑똑하게 주님이 내게 말씀해 주셨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과 놀라움에 고꾸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왜 기독교가 복음인지, 종교가 아니고 진리인지를 알았다. 모든 종파와 분파를 넘어서 존재하고 계신 주님의 그 분명한 현존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새벽 기도를 하는데 주님이 내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다. 내가 저축해 놓은 돈을 필요한 데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만큼은 곧바로 순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똑같은 음성이 들려오는데 심장이 멎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영적 호흡이 막히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며칠 뒤 하나님께 필요한 곳을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안요한 목사님의 맹인교회와 한동대학교에 헌금하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날 새벽 기도가 끝나고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의외로 완강했다. 자식 결혼을 위해 준비해 놓은 돈이니 함부로 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 시험이 아내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다음날부터 아내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3주 정도 흘렀을 때 아내는 하나님께 손을 들고 말았다.

 

마침 공관장 회의가 있어서 일시 귀국하게 되었고, 도착한 다음날 아내와 나는 안요한 목사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전날 아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아내는 그 순간에도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다. 그 날은 군복무 중인 아들과 면회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 나타난 아들 녀석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안경도 쓰지 않고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야구공에 맞아 안경이 박살났어. 병원에서는 실명 안 된 게 다행이래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아내는 “아이고, 하나님….”을 찾았다. 다음날 헌금을 가져다주기로 한 곳이 맹인교회가 아닌가! 하나님의 경고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아내와 나는 부리나케 맹인교회로 달려갔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사랑의 영이신 성령이 일하시면 사랑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와 감동시키시니까 말씀을 통해 머리로만 알던 사랑이 내 가슴으로 뜨겁게 전달되고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것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이다.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시인하고 고백할 때, 그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도 없다.

 

또 하루는 웰링턴 한인교회에서 새벽에 기도하는데, 주님이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안에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나는 엄마가 그리워 매일 같이 시장통 큰길가에 나가 엄마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었다. ‘그러셨군요, 주님! 지금까지 살아온 게 온통 주님의 은혜였군요….’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을 주신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내 존재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감정이 눌려 있다. 죄에 사로잡혀 있든지 아픈 상처에 눌려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로 토해 내지 않으면 이 죄와 상처에서 해방될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눌려 있는 것들을 다 쏟아 놓게 해서 참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슬퍼하는 자, 애곡하는 자들이 죄와 슬픔을 고백하고 성령의 평강과 위로와 사랑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들은 비로소 죄와 상처와 슬픔과 근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린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을 충만하게 채워 주실 때, 그때에야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

 

실전! 기도

방언 은사를 구하라. 방언 은사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누구나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은사는 대략 20여 가지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신유의 은사나 말씀의 은사 등은 모두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방언 은사만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라고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만약 방언 기도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겸손했던 그가 이를 자랑으로 내세울 리 없었을 것이다. 아직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이를 사모하며 달라고 하나님께 강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면, 방언 은사를 달라는 데 주시지 않을 분이 아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받고도 통변이 되지 않으면 답답하니까 많이들 힘들어한다. 그렇지만 방언은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럴 때는 오히려 주님께 바짝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 통변의 은사를 간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라고 권면한다. 강청하면 성령님이 반드시 통변의 은사를 주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방언까지 통변하는 은사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은사자들은 반드시 말씀을 먹어야 한다. 방언 기도를 할 때는 말씀으로 인도받아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결코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나뭇가지가 스스로 능력 있다고 뛰어다니면 불 속에 던져질 뿐이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기도는 내 혀를 주께 맡기는 것이다. 내 혀를, 내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바로 영의 통로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때 성령님이 임하셔서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리고 기도에는 언제나 감사가 따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치든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비참하지만 그것도 나를 정금 같이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위급한 상황이 닥칠수록 감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가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항상 기뻐라하.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3부 새벽 기도는 문제 해결의 원동력이다

새벽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

하루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 인사동 사거리를 지나다가 언뜻 오락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오락실 앞에는 커다란 자동차 경주 오락 기계 두 대가 놓여 있었는데, 한 청년이 한창 신나게 오락을 즐기는 중이었다. 화면으로는 고속도로가 계속 펼쳐지고 오토바이처럼 생긴 의자 위에 가만히 않아서 좌우로 핸들만 돌리고 있는데도 이 청년은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어찌나 실감이 나던지…. 그런데 순간 ‘아,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오토바이 위에 올라가 앉아서 핸들만 돌리는 사람! 핸들만 움직일 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 말씀만 입으로 나불거릴 뿐 변화가 없는 사람! 나 또한 그랬다. 성령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쉼 없는 기도를 하기 전까지는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새벽 기도로 하나님께 집중 훈련받기 전까지는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나 나는 주일 대예배를 빠짐없이 드리면서도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다. 나의 42년 동안의 삶이 그 증거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 새벽 기도야말로 삶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장성한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대예배이다. 새벽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면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 하나님과 만나는 독대의 순간에 맛을 들이면 새벽 예배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은혜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나를 성전으로 향하게 하는 동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새벽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찬양하고 높여 드릴 때 그분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며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된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드리면 주님은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다.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속사람을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날마다 교회에 나와서 새벽을 깨우는 자에게 이러한 복이 충만하게 채워진다.

 

새벽 기도의 신령한 축복

새벽 기도의 신령한 축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됨으로써 갖가지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가정에 행복이 찾아오고, 자녀들이 잘되는 복과 물질의 복, 직장의 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 가정은 내가 변화된 뒤로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 우리 집 가정 예배는 굉장하다. 아이들 셋과 우리 부부 모두가 손을 잡고 방언으로 통성 기도를 한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고 너무 기쁜 나머지 서울에 있던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시켰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을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각각 생활 리듬이 달라 자주는 못 드리지만, 나는 이 시간이 너무 기쁘다. 우리 가정이 주님의 몸을 이루는 천국의 모형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다 함께 손잡고 기도할 때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새벽 기도의 마지막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현장을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2001년 5월 뉴질랜드 대사로 있을 때, 나는 여느 때처럼 웰링턴한인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여왔다. “네가 뉴질랜드에서 눈물로 전했던 것처럼 워싱턴에서도 전해야 하리라.” 나는 너무 놀라서 주님께 되물었으나 똑같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지 3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정말로 주미 공사로 전근을 하게 되었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모두들 놀랐다.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시아통이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그 자리는 야심 있는 사람들이 무척 탐을 내던 자리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얼른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내 기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 기도는 주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기복 신앙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나보다 못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이 흘러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이웃을 위해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먼저 내 집을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는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올려 드리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왜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창조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실전! 새벽 기도

이처럼 중요한 기도 생활을 하기로 결단했다면, 새벽을 깨울 수 있도록 도우심을 구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자기의 의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믿기로 결단했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이 내 삶에 역사하신 가장 놀라운 일이다. 나 같은 골초가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라지만 아무리 건강에 좋다고 해도 몇십 년 동안 굳어진 라이프스타일(생체리듬)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이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요즘 같은 현대인의 생활 패턴에 비춰 보면 확실히 새벽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길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주님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의지의 결단이다. 결단하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뛰어다닐 때 주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새벽에 깨워 주신다. 그때 방언의 은사라는 선물도 주시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기란 누구도 쉽지 않다. 새벽에 잠을 이기려고 하면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새벽에는 절대 투쟁할 수 없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절대 안 따라 준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려고 투쟁하기보다는 전날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밤과의 투쟁인 것이다. TV든 컴퓨터든 책이든 내가 즐기던 것들이 일찍 잠자리에 드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를 포기하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하다. 밤의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잘라 내고 꺼 버리면 새벽에 주님을 만나 은혜 가운데 서 있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나서 출근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은 그야말로 새벽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특별 ‘뽀~너스’이다. 이 때를 직장에도 가정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으로 활용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책을 읽는 한 시간의 여유를 갖는 것만으로도, 운동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다.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러 학원에 가는 것도 단절 없이 배울 수 있는 이점에 있어 좋다. 나도 이 시간을 활용해서 중국어를 배웠다. 이 시간이야말로 영육이 강건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쓰시기 위해 훈련하시는 시간인 것이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시간, 또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귀한 시간들을 통해 삶이 변화되고 다른 이들의 삶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야 그 기쁨을 알게 된 나는 오늘 저녁도 내일 새벽 성전에서 나를 만나 주실 그 주님의 품을 그리며 일상의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잠들기 전에 침대 앞에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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