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기도 분석

유광웅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졸업
스위스 Zurich 대학에서 신학전공
스위스 Basel 대학에서 신학석사
스위스 Basel 대학에서 신학박사
귀국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청목과정을 이수하여 장로교(통합)에 소속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14년간 교수로 재직
현, 서울 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현, 동신교회 청년부 지도 목사

성령의 은사 가운데 대표적인 은사로 방언을 꼽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으로서 방언만큼 확실히 눈에 띄는 은사도 없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방언은 다른 어떠한 은사보다도 특별히 논란을 일으켜온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의 반대자들 뿐 아니라 그 옹호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몰이해와 혼란이 실재한다. 일방의 과장은 다른 편의 과장된 반격을 유발한다. 우선 방언은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될 필요가 있다.

오순절(행 2)에 나타난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고전 12와 14) 사이에는 몇 가지 상이한 요소들이 있다. 우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는 1백20명의 제자들 전체가 한꺼번에 ‘통성’으로 방언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통성 방언이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으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즉 성령께서 방언하는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도 동시에 작용하여 각자 자기들이 태어난 고장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일부 주석가들은 오순절에 약 1백20명의 제자들이 제각기 여러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타 지방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없으려니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으로 사람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고 예언하였다는 구절이 전혀 없다.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찬양·감사이며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이다(고전 14:2, 행 2:11).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었다. 사도행전 2장 9절~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의 각 지방에서 태어난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은 당시 대부분 예루살렘에 정착해 살고 있던 자들로서 유대인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코이네’라는 그리스어를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공용어를 놔두고 저들이 태어난 여러 지방의 실재 언어들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통성으로 하는 방언을 들은 일부 사람들이 대낮에 새 술에 취했다며 제자들을 조롱하자 베드로가 일어나서 비로소 방언이 아닌 공용어(아람어)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심을 증거 해주는 하나의 표적이었을 뿐이다.

오순절 예루살렘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방언은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그 어떤 외국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하도록 하실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적’을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방언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방언의 내용은 계시나 지식, 또는 예언이나 교리가 아니다(고전 14:6). 방언은 간구기도라기 보다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자유로운 감사, 찬양, 경배의 표현이다.

방언은 일차적으로 성도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덕을 세워주는 유용성을 지닌다(고전 14:4). 방언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자기의 덕을 세우며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영적 쇄신을 이루어 간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탁하며,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과 축복 속에 잠기게 된다. 모든 방언은 아람어 ‘Abba’(아바)라는 기도 외침으로 압축될 수 있다.

방언은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초월하여 우주적 음성 영역 속에 잠입하여 언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슬이며 감옥이다. ‘언어의 장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단어 실력을 초월하여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넘쳐흐르는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나 불완전하고도 거친 도구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그런데 우리는 단 하나의 입밖에 없다. 방언은 만 개 이상의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방언에는 한계가 없고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무중력 상태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방언은 언어의 안식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개념들(단어들)에 담아 문법이라고 하는 틀에 정돈하는 아주 힘든 노동이다. 방언은 이 언어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며 펼치는 축제이다. 방언은 풍요로운 은혜의 축제이며, 그 안에서는 행위를 통해 의로워진다는 율법성이 전혀 없다. 방언은 내일이 오늘 되게 하며 이미 내일 속에서 이야기한다.

방언의 환호성은 우주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다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방언이 언어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7일 중 하루의 안식을 가질 뿐이다. 방언의 안식 역시 엿새 동안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하고 찬양한 후에 누리는 축제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안식 속에 지속적인 축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방언은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그 안식의 복락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방언은 ‘마란 아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종말적인 환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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