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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 글]

 

-방언이 안 되시는 분들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시도해야 하는 방법-

 

Part1)

누구나 받았다는 설교를 듣고도 방언이 안 열리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법은 100% 다 방언 받는 방법이야..라는 방법 조차도 자신에게는 튕겨져 나갔던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한 번 안수 받으면 다 방언이 터진다는 그 손길에도 한결같이 끄떡 없으셨던 분들 역시 계실 줄 압니다.

 

남들은 그 방법으로 100%다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데, 유독 자신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 절망감이란 온 우주에서 자신만 혼자 고아가 된 것만 같은 커다란 실망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2006년 즈음부터 사모했지만 일련의 시간들이 흐른 후 비로서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언 때문에 밤 10시 반에 손전등 하나없이 산 정상에 올라가서 부르짖은 적도 있습니다.

오산리 기도원 가서 금식하며 떼쓰다가 우리말만 유창하게 말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손기철 장로님 집회 가서 스텝분에게 방언을 위해서 안수 받았는데 전혀 요동하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에게 쓰러짐 현상만이라도 경험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스텝분께 예의상 넘어져 드리고 누워있다가 그냥 집에 무사히 잘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한 달을 여의도 순복음교회 철야예배에서 기도하다가 저는 방언 못하고

얼떨결에 따라와서 사모하지도 구하지도 않았던 제 후배만 방언을 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동네 개방된 교회에서 불 하나 안켜고 새벽마다 혼자 부르짖은 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때까지 저의 생각 속엔 "방언은 강권적으로 터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곧 약하게 임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 입에서 무언가가 살며시라도 터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니면 초자연적으로 어떤 말들이 생각이 나거나,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속에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방언 간증들을 접하면서, 강권적으로 이른바 터져나오는 방언도 있지만,

믿음으로 열어 가야지만이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체험만을 기준으로 제시하며 다른 경험들을 멸시하는 의견들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약간 분노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런 정형화된 기준들 때문에 스스로가 묶여서 오랫동안 방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낙심하고 계신 다른 분들도 분명 예전의 저처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방언 간증들을 보시면 극적인 체험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치유같은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해했습니다. "주님, 이 간증들이 정녕 기준입니까?" 그랬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간증 안하는 사람들 중에도 동일한 은혜들을 체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극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혹 분명하게 다가온 경험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간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모든 간증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론 극적이고 분명한 성격들을 주로 띠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러한 간증을 부러운 마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기준을 은연중에 스스로 높게 잡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아..저런 식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구나. 아.. 저런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하지만 당시 방황하고 있었던 저를 구출해 준 분들은, 자신의 체험을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간증한

소박하고 진실된 분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분들의 체험이 저에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방언이 터져나오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혀가 강권적으로 말리고 턱이 떨리며 우리말을 하려고 해도 주체할 수 없도록 방언이 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극적인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거나 충만한 기쁨과 감격 가운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많은 은혜의 영역들 가운데서도 극적인 현상과 체험을

수반하는 경우들이 있고, 그와는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론 같은 은혜에 접촉되는 경우들이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저는 유심히 관찰한 결과 알게 되었습니다.

 

Part2)

이래도 저래도 방언이 도저히 안 되시는 분들은 진정으로 어린아이 같이 반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간증들과 이론들로 인해 견고히 높아진 벽을 하나님 말씀과 단순한 믿음의 강력으로 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큰믿음 교회 등록하기 전부터 방언을 위해 기도받았다가, 이미 받았다는 말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언에 대한 저의 기준은 극적인 간증들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이 방언일 것이라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그런 애매모호한? 방언이라면 다시 제대로?된 방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상보다 그토록 본질을 추구하고자 달려가는 큰믿음 교회의 흐름 안에서,

저는 어떤 가능성을 스스로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방언이 나타나는 현상보다, 내 안에서 방언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였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리 매달려도 가슴에 멍만 들게 하시지 도무지 응답이 없으신 주님께 대한 원망감이,,

누르고 눌러서 표출하지 않았을 뿐 정말 사무칠 정도로 그런 서운한 마음이 그 당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랄랄랄라~ 를 그저 갑자기 하고 싶어서 내뱉어서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내가 의지적으로 흉내내는 것이지, 수많은 간증들에서 보여지는 그런게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시 벼랑 끝에 몰려서인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침노함으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방언은 내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란 다만 혼적인 기도 곧 모국어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랄랄라든 할렐루야 든 상관없다.

나는 모국어가 아닌 어떤 말들을 하면서 그것이 방언 곧 영의 기도 가운데로 접촉된다고 믿을 것이다.

내가 의지적으로 말을 지어내면서 하는 것 같아도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이것이 나의 방언이라고 믿는다.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나 격렬한 느낌이 없이도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초자연적인 언어라고 믿겠다.

주님은 나의 오랜 갈망을 잘 알고 계셨으며 나의 올바른 동기도 이미 감찰하셨다.

내가 잘못 인도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방언을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흉내낸다며 조작한다며 비아냥거려도 상관하지 않겠다.

방언의 본질은 내 발성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은사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시다."

 

이렇게 믿고 제가 하는 말을 그저 방언이라고 믿고 의지적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이게 뭐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성령님께서 반드시 올바른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심도 들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더 지치고 지겨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는 터라 입도 아프고 턱도 뻐근하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냥 어린아이 같이 반응하려고 고군분투 했습니다.

(참고로 먼저 방언을 했던 저의 형님이 어느날 새벽에 갑자기 제게 와서는,

그것을 위해선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도전을 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것을 어떻게 방언이라고 믿고 할 수가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에겐 성경 말씀에 무엇이라고 나와있는지 말씀 분별부터 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위 두 구절 말씀은 모든 영역에서 신자의 믿음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느낌이 없어도, 치유의 느낌이 없어도, 받은 은혜의 느낌이 없어도, 친밀함의 느낌이 없어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미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내가 현재 모국어가 아닌 어떤 말들을 시도하면서 그것이 방언이라고 믿는 것이 곧 믿음입이다.

만일 그 말이 방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믿음은 반드시 응답을 가져오는 역사하는 믿음일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의 고집스러운 자기 생각들을 내려놓고 이러한 믿음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방언이라고 믿고 하는 말들에 기름부음이 느껴졌습니다.(안 느껴져도 상관없습니다만)

남들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지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그 일들이 제 입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소리가 바뀌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저는 같은 방식으로 시도했음에도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달랐고 다음날이 또한 달라지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전날의 소리대로 시도를 해 봐도 전에는 잘만 되었던 것이 잘 안되고 지금 현재 잘되는 것만 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발음이 새서? 다른 무언가를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이것도 초자연적인 나의 언어일수 있어." 라고 단순히 믿고 그냥 열심히 의지적으로 했습니다.

그런 것 중에는 처음부터 기름부음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몇 일 후에, 새로이 붙잡아 시도했던 그 말들이 제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접촉하려고 시도할 때엔 그저 의지적으로 힘겹게 붙잡고 쥐어짜내듯 한 것들도 있는데,

얼마지 않아 "도대체 이런게 뭐지?" 할 정도의 격렬한 방언으로 변해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너무 신기해서 중간에 웃음 터지고 웃음 참느라 방언을 한 동한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방언 통변을 받아 본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지만, 통변 없이도 저는 제가 하는 방언이 영의 언어라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체험이 언제나 나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거나 절대적인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구원의 현상?이 알 수 있도록 따라온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현재적으로 회개한 상태이고 내 삶을 비우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인 자로서 구원을 확증합니다.

또한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은사들이 나타나고 열매들이 드러나는 것으로 또한 저의 구원을 스스로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경로와 방법들에 있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가져와서, 그 기준이 아니면 절대 안된다..라고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은혜스런 무언가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 경험만을 성경적인 기준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터부시하거나 멸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언 역시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입을 열어 믿음으로 시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이 풀어지는 방법이 여러가지 경로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모함과 올바른 동기와 단순한 믿음으로 시도한다면,

누구나 다 방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얼마든지

방언일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성경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14:5)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Part3)

모국어가 아닌 다른 말들을 그냥 믿음으로 소리내어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건 흉내다..그건 불경건한 방언이다..그런 것은 성령님의 방언이 아니다..

라는 식의 그들만의 자기 이론들은 마음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의 기준이 성령님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현상의 역사들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모순의 극치입니다.

의지적인 연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설령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지적으로 반응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또한 풍성한 은혜들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언이 풀어진 후에도 안 쓰던 근육을 움직이는 터라,

그것이 잘 되었다 안 되었다 기복이 생기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도 낙심치말고 계속 시도하셔야 합니다.

"거봐, 가짜 방언이니까 이렇게 또 안 되지.. 진짜 방언은 물 흐르듯 잘 나오는 건데.."

라는 음성에 휘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역자분들이 종종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의아해 하는데도, "성도님 지금 방언 하시는 겁니다."

예전엔 그말을 주워들으려 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께선 일선 사역의 현장을 통해 체득한 이러한 원리들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것을 믿으시고 단순하게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기름부음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어도,
'이것이 나의 방언이며 누가 뭐래도 나는 이 방언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겠다'라는 믿음으로 계속 열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확신이 설 때까지 계속입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면, 입 안에서 강하게 흘러나올 수 있도록 그 발성과 조음에도 기름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그러나 기름부음이 안 느껴져도 의심하지 마세요)

내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어떤 말이라도 의지적으로 할 때,

내 안에서 방언의 은사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 영이 기도하게 될 것이며,

이 기도는 영으로 접촉되는 것이며 주님과 영으로 교통하는 통로라고 그냥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이기 때문에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통성기도 시간에 자신이 말하는 그 언어를 방언이라고 믿고 담대히 입을 열어 말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주변의 통변 은사자가 듣고서 가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누가 내 것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이런 생각들을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또한 어떤 분은, "제 안에는 성령님이 계신 것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방언의 능력이 제게 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겠네요."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찾아와 거하실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로써 스스로 확증하시면 됩니다.

죄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고 그 분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의지적 상태를

내면 가운데 확고히 하시면 됩니다. 그 이후엔 역시 내 안에 성령님도 계시고 방언의 능력도 와 있음을

단순하게 믿으시면 됩니다. 느낌과 상관없이 이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체험을 진솔하게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조금 있어 보일려고 미사여구를 사용하지도 않았구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체험처럼

조금도 위장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낙심되고 다른 사람의 체험이 내게 오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주저앉은 상태로 수 년 혹 수 십년씩 흘려보내고 계신 억울한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방언 못하신다고 기죽지 마시고, 반드시 사모하는 심령에게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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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wanjeong/588


120108 히5:1-7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셨는데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 ”하셨다.(마26:38) 그리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옴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다.

이상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매우 큰 고통으로 여기셨고 가능하면 이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움 없이 쉽게 맞지 않으셨다. 아무 고통의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쉽게 맞으셨던 것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셨고 십자가를 큰 고통으로 맞으셨다.

예수님은 그때 기도하실 때 얼굴을 땅에 대고 하셨다.(마26:39)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기도의 땀방울이 떨어져 핏방울 같이 되었다.(눅22:44) 얼마나 애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일까!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하였다.(히5:7)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얼마나 큰 고통과 눈물의 죽음이었던가 깨닫게 된다.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우리는 뭐라 말해야 할까?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통곡과 눈물로 쏟아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솔직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여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고 가는 당신을 향해 눈물 흘리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하셨다.(눅23: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린다.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 일이 얼마나 많으냐? 너희는 왜 울지 않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렇게 기도하게 된다. “예수님, 내 눈이 밝아져 이 세상의 울어야 할 일들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예수님, 내 눈이 밝아져 또한 나 자신의 울어야 할 처지를 보게 해주세요. 그리고 예수님, 무엇보다 당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주셔서 당신 앞에 나의 모든 힘겨움과 슬픔을 솔직히 쏟아낼 수 있게 해주세요. 당신이 겟세마네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끝은 십자가 지는 결단이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을 놓고 기도하시다가 이어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겠다는 결단을 내리셨다.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실 때, 죄로 인해 심판당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다.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다. 눈물로 말할 때 가장 호소력 있다. 기도할 때 가장 힘 있게 하는 것은 눈물로 기도할 때일 것이다. 새해, 우리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자. 눈물로 기도하기까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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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님은 24세에 결핵판정을 받아 친구 이환신의 고향인 평남 강동으로 요양을 갑니다. 그때가 1925년이었고 이용도와 이환신은 신학생이었습니다.

둘이 강동에 가자 교회에서 주의 종들이 왔다고 부흥회를 해 달라고 부탁해
둘은 밤새 기도하고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설교는 이환신이, 사회는 이용도가 맡았는데
이용도는 앞에 나가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부흥회는 눈물의 부흥회였고
그날 이후 이용도 목사님이 가서 말씀 전하는 교회마다 마루바닥이 눈물로 젖었습니다.
언젠가는 설교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고 교우들도 다 눈물로 뒹굴었다고 합니다.

이용도 목사는 1901년 생이고 1933년에 죽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세 차례 감옥 생활을 했을 정도로 그는 일제에 수난 당하는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불쌍한 백성 앞에서 눈물이 수르르 났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회생이 어려운 폐병에 걸렸습니다. 불쌍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수르르 났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눈물이 수르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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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기도 분석

유광웅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졸업
스위스 Zurich 대학에서 신학전공
스위스 Basel 대학에서 신학석사
스위스 Basel 대학에서 신학박사
귀국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청목과정을 이수하여 장로교(통합)에 소속
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14년간 교수로 재직
현, 서울 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현, 동신교회 청년부 지도 목사

성령의 은사 가운데 대표적인 은사로 방언을 꼽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으로서 방언만큼 확실히 눈에 띄는 은사도 없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방언은 다른 어떠한 은사보다도 특별히 논란을 일으켜온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의 반대자들 뿐 아니라 그 옹호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몰이해와 혼란이 실재한다. 일방의 과장은 다른 편의 과장된 반격을 유발한다. 우선 방언은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될 필요가 있다.

오순절(행 2)에 나타난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고전 12와 14) 사이에는 몇 가지 상이한 요소들이 있다. 우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는 1백20명의 제자들 전체가 한꺼번에 ‘통성’으로 방언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통성 방언이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으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즉 성령께서 방언하는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도 동시에 작용하여 각자 자기들이 태어난 고장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일부 주석가들은 오순절에 약 1백20명의 제자들이 제각기 여러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타 지방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없으려니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으로 사람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고 예언하였다는 구절이 전혀 없다.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찬양·감사이며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이다(고전 14:2, 행 2:11).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었다. 사도행전 2장 9절~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의 각 지방에서 태어난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은 당시 대부분 예루살렘에 정착해 살고 있던 자들로서 유대인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코이네’라는 그리스어를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공용어를 놔두고 저들이 태어난 여러 지방의 실재 언어들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통성으로 하는 방언을 들은 일부 사람들이 대낮에 새 술에 취했다며 제자들을 조롱하자 베드로가 일어나서 비로소 방언이 아닌 공용어(아람어)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심을 증거 해주는 하나의 표적이었을 뿐이다.

오순절 예루살렘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방언은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그 어떤 외국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하도록 하실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적’을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방언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방언의 내용은 계시나 지식, 또는 예언이나 교리가 아니다(고전 14:6). 방언은 간구기도라기 보다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자유로운 감사, 찬양, 경배의 표현이다.

방언은 일차적으로 성도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덕을 세워주는 유용성을 지닌다(고전 14:4). 방언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자기의 덕을 세우며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영적 쇄신을 이루어 간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탁하며,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과 축복 속에 잠기게 된다. 모든 방언은 아람어 ‘Abba’(아바)라는 기도 외침으로 압축될 수 있다.

방언은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초월하여 우주적 음성 영역 속에 잠입하여 언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슬이며 감옥이다. ‘언어의 장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단어 실력을 초월하여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넘쳐흐르는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나 불완전하고도 거친 도구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그런데 우리는 단 하나의 입밖에 없다. 방언은 만 개 이상의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방언에는 한계가 없고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무중력 상태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방언은 언어의 안식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개념들(단어들)에 담아 문법이라고 하는 틀에 정돈하는 아주 힘든 노동이다. 방언은 이 언어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며 펼치는 축제이다. 방언은 풍요로운 은혜의 축제이며, 그 안에서는 행위를 통해 의로워진다는 율법성이 전혀 없다. 방언은 내일이 오늘 되게 하며 이미 내일 속에서 이야기한다.

방언의 환호성은 우주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다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방언이 언어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7일 중 하루의 안식을 가질 뿐이다. 방언의 안식 역시 엿새 동안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하고 찬양한 후에 누리는 축제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안식 속에 지속적인 축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방언은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그 안식의 복락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방언은 ‘마란 아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종말적인 환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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