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장애소년' 아래아한글 만들고, 지금은…

[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24> 아래아한글 개발자, 정내권 엠트레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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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찬진 사장이 한글과컴퓨터를 세웠을 때, 도스용한글에서 한글2002까지 개발을 주도했던 정내권(사진) 엠트레이스 대표. 그가 기업용 모바일 소프트웨어로 실리콘밸리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 새너제이=유병률기자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사람,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못 벗어난 사람,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선 안철수, 이재웅보다 더 유명했던 미다스의 손. 우리가 흔히 아래아한글이라고 부르는 한글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사람, 그래서 개발자들 사이에선 ‘신(神)’이라 불렸던, 전설적인 이름. 바로 정내권(45)이다.

기자의 사무실이 있는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건물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눈인사를 하게 되었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에 유독 눈에 띄었던 그가 알고 보니 바로 정내권이었다. 그는 컴퓨터 천재들이 모여들고, 트렌드가 정신없이 팽팽 돌아 가는듯한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서 혼자 묵묵히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다.

걷지 못하는 시골 소년에게 PC가 생겼다
학교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한 시골소년이 PC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 스토리는 전설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전라도 광주는 시골이었고, 휠체어를 타고 통학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늘 혼자였고, 집안에만 있었다.

“걷거나, 뛰거나, 밖에 나가 놀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했던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시절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뭔가 주어졌다가 박탈당했으면 힘들었겠지만,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했던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특별한 성장과정을 담담히 말했다. 어렵고 힘든 유년의 기억조차 성공스토리를 위한 스펙으로 드러내놓기도 하는 세상에서 그는 그저 담담히 추억할 뿐이었다.

열 여덟 살, 박탈당한 기억조차 없을 만큼 가진 적이 없던 그에게도 대단한 그 무엇이 주어졌다. 대우전자에서 만든 8비트 PC. "컴퓨터라는 게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래서 무작정 컴퓨터 잡지 한 권을 샀죠.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몇 권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보니까 조금씩 이해가 되더군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한대 장만했는데, 그때부터 내 안에 참았던 어떤 것이 막 분출되기 시작했어요. 몰입이랄까요? 머릿속에 오직 컴퓨터밖에 없는 몰입이 시작됐던 거죠.”

그렇게 컴퓨터와 자신을 구분할 수 없었을 정도로 몰입했던 그는 딱 2년 후 스무 살 때부터 소스코드를 작성해 컴퓨터잡지에 기고하면서 평생 처음으로 집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몸이 아니라 정.내.권.이라는 컴퓨터전문가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리고 스물 세 살이 되던 1980년대 후반 그는 서울로 상경했다. PC통신으로 알게 된 박흥호 전 나모인터랙티브 사장(당시 국어교사)의 권유로 서울 종로구 한글 문화원에 합류했다. 한글문화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가 한글 과학화를 위해 설립한 연구소. 그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 박사의 세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 작업을 도왔다. 이곳에서 이찬진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장이 경영에 주력하는 동안 그는 도스용 한글에서부터 한글 2002까지 만들어냈다.

“주어진 조건에 비해 운이 좋았던 거죠.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왔다기 보단, 열심히 빠져있다 보니 의도치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들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불편한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죠.” 박흥호, 공병우, 이찬진… 그의 불편한 부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재능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름들이다.

도전조차 안 하면 성공가능성은 제로
그는 이찬진 사장이 한컴을 그만둘 때 함께 나와 드림위즈를 같이 만들었고, 이후 드림어플라이언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드디어 정 대표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웹소프트웨어에서 모바일로 확 건너뛰었다. 그게 십 수년 전일이다. “유선인터넷의 의사소통기능이 휴대폰에 접목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빨랐던 탓일까? 새로운 세상은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한 대기업 휴대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공급했지만, 그의 표현대로 ‘한국의 대기업과 일해서 돈 벌기는 쉽지 않기에’ 그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2008년 “왠지 중원에 나가고 싶어서” 무림의 고수처럼 실리콘밸리로 나섰다. 30여명 직원은 한국에서 개발과 영업을 하고, 그는 가족만 데리고 나왔다. “나이도 많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나 학맥도 없었고 해서 마음 속으로만 꿈꾸고 결행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불편한 조건들이 큰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력 난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조건도, 대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조건도 담담히 생각해왔는데, 그 따위 불편한 것들이 무슨 문제이랴.

미국에 와서 처음 2년은 인스타그램처럼 사진을 편집해서 소셜네트워크로 공유하는 서비스, 날씨정보를 제공하는 앱 등 소비자들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녹록하지 않았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바일 서비스는 굉장히 감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나이가 중년이 되고 보면 다들 느끼게 되는 고뇌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트렌드, 새로운 서비스는 머리로 따라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젊은이들이 왜 열광하는지 그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체득해야 하는 거니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해서 찾은 게 바로 기업용 모바일 소프트웨어였습니다.”

그는 기업용 소프트웨어시장에서의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했다. 기업의 업무환경이 클라우드와 모바일을 통해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 기업용 이메일 소프트웨어, 기업용 CRM솔루션, 클라우드 기반의 기업내 모바일 매니지먼트서비스 등이 현재 그가 주력하고 있는 아이템이다.

‘컴神’이라 불리던 내공에 비하면 아직은 작지만 올해 엠트레이스의 매출 예상액은 50억원. 그가 한컴에서 나와 독립한 이후부터 따져보면 가장 큰 액수이다. 모토로라는 구글에 인수됐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그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전 기종에 탑재했다. 실리콘밸리가 이제야 신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 그는 이제 미국에서의 영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현지직원들도 채용할 예정이다.

야후도 못하는 걸, 젊은 친구 혼자서 뚝딱한다
정 대표는 4년 전과 지금 실리콘밸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실리콘밸리는 화려하고 공정한 무대 같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유리벽안에서 굉장한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입니다. 인맥에 의해 성공이 좌우되고, 빤히 눈앞에 보이지만 유리벽 때문에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무대 말이죠.”

그가 4년여 실리콘밸리에 도전하면서 짚어낸 세 가지는 이렇다. 첫 번째 “물론 유리벽이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어요. 야후 같은 대기업이 무슨 서비스를 시작하면 망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젊은 친구가 혼자 어디 처박혀서 뚝딱 만들어낸 서비스는 크게 성공하더라는 거죠. 제 눈으로 수없이 봐왔어요. 그게 지금처럼 빛의 속도로 변하는 트렌드를 거대기업보다 그 트렌드 속에 있는 한 청년이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한국의 젊은이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자질과 능력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지요. 어떤 젊은이가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대기업에서 똑같은 것을 만들어버리면 이내 먹히고 맙니다. 실리콘밸리보다 실패확률이 더 높아요. 설령 성공해도 이곳처럼 대박이 날 수가 없어요. 열매도 작지요. 한국에서 이쪽 분야는 정말 아직도 척박합니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아무리 현실이 척박해도 꿈까지 작아서는 안 된다”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했다. “한국의 젊은 친구들이 만드는 제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꿈의 사이즈가 참 현실적이에요. 작다는 겁니다. 크게 꿈꾸면 크게 다칠까봐 그렇겠지요. 워낙 현실이 척박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시하게 출발해도 최종목표는 거대해야 합니다. 왜냐면 잠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드는 서비스나 제품을 쓸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그런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빛의 속도로 변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제가 콕 박혀서 컴퓨터에 몰두했던 시간들, 몰입했기 때문에 정말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예나 지금이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말이죠. 그런 시간들에 비하면 간판과, 인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전라도 시골마을이 아니라, 실리콘밸리에서 또 한 번 충분히 혼자 몰입의 시간을 보낸 컴神 정내권 대표가 만들어낼 새로운 전설이 궁금해진다.

[유병률기자 트위터 계정 @bryuvalley]

 

http://news.mt.co.kr/mtview.php?no=2012112514593477268&V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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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dy's raises S. Korea's sovereign rating to 'Aa3'
This file photo taken on Sept. 29, 2011, shows Tom Byrne, senior vice president and regional credit officer at Moody's Investors Service, holding a press conference in New York to talk about the South Korean economy and the outlook on the country's sovereign rating. On Aug. 27, 2012, Moody's raised its sovereign rating on South Korea by one notch to "Aa3," citing the country's strong fiscal fundamentals, higher economic resilience and competitiveness. (Yonhap)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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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터넷주소(도메인이름) 분쟁백서(2012년판)

 

 

*페이지를 펼쳐서 보시면 상단 중앙쯤에 화살표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페이지를 넘기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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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esy Economic Strategy Institute
Clyde Prestowitz

Clyde Prestowitz, a labor economist who came to prominence as one of America’s top trade negotiators during the Reagan Administration, for decades has worried about the decline of U.S. economic competitiveness.

In the 1980s, he worried about Japan’s takeover of industries, such as electronics and steel, which the U.S. had long dominated. He has long been critical of Washington’s embrace of free trade and its aversion to the industrial policy that countries like South Korea practice.

Last month, Mr. Prestowitz got attention in South Korea when he published a column on the Web site of Foreign Policy called “Korea as Number One.”

“The South Koreans have long been confident that anything the Japanese can do, they can do better,” he wrote. “But now they’re proving it.”

We caught up with Mr. Prestowitz, who is now president of the Economic Strategy Institute in Washington, when he was in Seoul last week doing more research. Here’s a portion of what he said:

WSJ: If South Korea has repeated Japan’s success, how can it avoid Japan’s failures?

Mr. Prestowitz: Korea is doing to Japan right now what Japan did to the United States in the 1980s. I guess one way Korea can avoid, and maybe has avoided, Japan’s failures is Korea went through the 1997 financial crisis and, as a result of that, cleaned up its financial system. Where the major downfall of Japan was the bubble of the late 80s and the collapse of the bubble, and the failure to respond quickly to the collapse of the bubble, Korea doesn’t appear to be facing that kind of situation. And the IMF helped it to clean up.

But I think that all of these things run in cycles. One problem that Korea shares with Japan, and is I think even farther along than Japan, is the aging of the population and the shrinkage of the population. Demographics is increasingly going to be an issue for Korea. And Japan being a much bigger economy came under pressure from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o conform more and respond to trade frictions. Korea has kind of been under the radar. But now it’s getting big, so it’s getting more attention. That will also bring its own complications.

Then you also have the factor that, in industries like semiconductors particularly, the investment requirements to stay in the game are just enormous. And they’re the kind of investment requirements that, if you slip, can bring down the whole company and even the country’s industry. Korea so far has made the right investment bets. The question is will it always be making the right investment bets and what happens if one of those goes wrong?

It’s not a cloudless sky, but it’s still pretty bright.

WSJ: Often we hear Koreans quietly talk about their fears about China. They are reluctant to air them in the mass media. But that seems to be a trait a lot of the world shares.

Mr. Prestowitz: It’s a trait that a lot of the world shares. I was last week in conferences in Singapore, then in Nanning and Hong Kong. The one commonality of the three conferences was that people were very careful about what they said and how they said it about China.

I think it’s kind of a problem in the global discourse. Where China is concerned, because of the lack of transparency in China, there’s a great reluctance on the part of businesses that have a stake in China to speak frankly.

WSJ: You’ve been worried about the long-term direction of the U.S. for a long time. What is your view of what’s happening with the American economy right now?

Mr. Prestowitz: The U.S. economy is struggling. The employment numbers are not moving in the right direction. Investment is not moving in the right direction. And I fear it’s going to be hurt a lot more by the European situation. Europe looks to me like it’s falling off a cliff. People don’t think about it this way but the EU is the biggest economy, bigger than the U.S. If that goes over the cliff, there’s no way it can’t have severe damage to the U.S. and Asia.

Ironically, I think the U.S. is in some ways in a better position than the rest of the world in that Europe is in for years of austerity and difficulty and the Asian countries are still so export-reliant. One myth that has been shattered is the myth of decoupling. So the impact of a slowdown in Europe will have a big impact on the Asian economies.

But because the U.S. is a deficit economy in trade, the U.S. does, if it got its act together, have an option for growth. That is to produce more domestically and import relatively less. There are discussions going on along those lines in the White House. President Obama has talked about the importance of manufacturing and making stuff in the U.S. That may be a straw in the wind of where the U.S. is going.

 

 

한국어 번역본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 미국정부의 무역협상전문가로 유명해진 노동경제학자 클라이드 프레스토비츠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경제의 경쟁력 저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1980년대에 그는 미국이 지배했던 철강 및 전자제품 등 각종 산업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다고 걱정했으며, 한국과 같은 국가의 산업정책에 거부감을 나타내며 자유무역을 포용하는 미국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지난 달 프레스토비츠는 국제관계 전문잡지 ‘포린 폴리시’ 웹사이트에 ‘1위 한국’(Korea as Number One)이라는 칼럼을 게재하면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인들은 과거부터 일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왔으며 이러한 자신감을 실제로 증명하고 있다.”

워싱턴 소재 경제전략연구소(ESI)에서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프레스토비치가 지난 주 추가 연구를 위해 서울에 방문했을 때 본지는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인터뷰 발췌문이다.

WSJ: 한국이 일본의 성공을 반복했다면 앞으로 일본의 실패는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프레스토비츠: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보인 행보를 한국이 취하고 있다. 이번에는 상대가 일본이다. 한국이 일본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은 이유 또는 답습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꼽자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금융시스템을 쇄신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침체의 길을 겪게 된 주요인은 1980년대 후반 거품 형성과 붕괴, 거품붕괴에 대한 신속한 대응 미흡이다.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IMF가 한국 금융시스템 개편에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순환한다는 생각이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된 문제이면서 일본에게 좀더 심각한 문제는 인구고령화 및 감소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인구는 점점 큰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보다 규모가 더 큰 경제국인 일본은 국제무역기준을 준수하고 무역마찰에 대응하라는 국제사회 압력을 한국에 비해 크게 받아왔다. 반면, 한국은 이러한 압력을 받지 않은 편이었으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다.

반도체산업 등 특정 산업에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실수할 경우 기업 전체, 한 나라의 해당 산업 몰락을 초래할 수 있는 투자규모이다. 한국은 이제까지 올바른 투자결정을 내려왔다. 문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만약 하나라도 실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완전히 창창가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망이 여전히 밝은 편이다.

WSJ: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조용히 이야기할 때가 많으며 언론에서는 이러한 내용 보도를 꺼리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

프레스토비츠: 그렇다. 지난 주 싱가포르와 난닝, 홍콩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이들 컨퍼런스의 한가지 공통점은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웠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담화에서 문제가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투명성결여 때문에 중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기업들이 중국 관련 문제에 대해 솔직히 말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WSJ: 오래 전부터 당신은 미국의 장기적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 왔다. 현재의 미국경제에 대한 의견은?

프레스토비츠: 미국경제는 고전하고 있다. 일자리수치가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사태 때문에 상황이 크게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은 추락하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미국보다 더 큰 규모의 경제인 유럽연합이 추락한다면 미국과 아시아가 받을 타격이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유럽이 몇 년 동안 어려움을 겪으며 긴축정책을 시행했으며 아시아국가들이 여전히 수출의존적이라는 면을 고려해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면에서는 미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리한 것 같다. 디커플링(탈동조화)에 대한 신화는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유럽경기침체는 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무역적자국인 미국은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성장할 수 있다. 바로 국내생산을 늘리고 무역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백악관에서는 현재 이러한 맥락의 논의가 오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내 제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경제정책 향방의 단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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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n interview with The Wall Street Journal, Nokia CEO Stephen Elop talks about innovation, management, and guiding the embattled company through a difficult transition.

Frank Nuovo, the former chief designer at Nokia Corp., NOK1V.HE -7.36%gave presentations more than a decade ago to wireless carriers and investors that divined the future of the mobile Internet.

More than seven years before Apple Inc. AAPL -1.63%rolled out the iPhone, the Nokia team showed a phone with a color touch screen set above a single button. The device was shown locating a restaurant, playing a racing game and ordering lipstick. In the late 1990s, Nokia secretly developed another alluring product: a tablet computer with a wireless connection and touch screen—all features today of the hot-selling Apple iP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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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Nokia designer Frank Nuovo says the company had prototypes that anticipated the iPhone.

"Oh my God," Mr. Nuovo says as he clicks through his old slides. "We had it completely nailed."

Consumers never saw either device. The gadgets were casualties of a corporate culture that lavished funds on research but squandered opportunities to bring the innovations it produced to market.

Nokia led the wireless revolution in the 1990s and set its sights on ushering the world into the era of smartphones. Now that the smartphone era has arrived, the company is racing to roll out competitive products as its stock price collapses and thousands of employees lose their jobs.

This year, Nokia ended a 14-year-run as the world's largest maker of mobile phones, as rival Samsung Electronics Co. 005930.SE -0.33%took the top spot and makers of cheaper phones ate into Nokia's sales volumes. Nokia's share of mobile phone sales fell to 21% in the first quarter from 27% a year earlier, according to market data from IDC. Its share peaked at 40.4% at the end of 2007.

The impact was evident in Nokia's financial report for the first three months of the year. It swung to a loss of €929 million, or $1.1 billion, from a profit of €344 million a year earlier. It had revenue of €7.4 billion, down 29%, and it sold 82.7 million phones, down 24%. Nokia reports its second-quarter results Thursday and has already said losses in its mobile phone business will be worse than expected. Its shares currently trade at €1.37 a share, down 64% so far this year.

Nokia is losing ground despite spending $40 billion on research and development over the past decade—nearly four times what Apple spent in the same period. And Nokia clearly saw where the industry it dominated was heading. But its research effort was fragmented by internal rivalries and disconnected from the operations that actually brought phones to market.

Instead of producing hit devices or software, the binge of spending has left the company with at least two abandoned operating systems and a pile of patents that analysts now say are worth around $6 billion, the bulk of the value of the entire company. Chief Executive Stephen Elop plans to start selling more of that family silver to keep the company going until it can turn around its fortunes.

"If only they had been landed in products," Mr. Elop said of the company's inventions in a recent interview, "I think Nokia would have been in a different place."

Nokia isn't the only company to lose its way in the treacherous cellphone market. Research In Motion Ltd. RIMM -2.66%had a dominant position thanks to its BlackBerry email device, but it hasn't been able to come up with a solution to the iPhone either.

As a result, the company has lost about 90% of its market value in the past five years, and its CEO is trying to convince investors the company isn't in a "death spiral."

Whereas RIM lacked the right product, Nokia actually developed the sorts of devices that consumers are gobbling up today. It just didn't bring them to market. In a strategic blunder, it shifted its focus from smartphones back to basic phones right as the iPhone upended the market.

Mobile Designs

Dan Krauss for The Wall Street Journal

Some of the devices Mr. Nuovo designed for Nokia.

"I was heartbroken when Apple got the jump on this concept," says Mr. Nuovo, Nokia's former chief designer. "When people say the iPhone as a concept, a piece of hardware, is unique, that upsets me."

Mr. Elop, a Canadian who took over as Nokia's first non-Finnish chief executive in 2010, is now trying to refocus a company that he says grew complacent because of its market dominance.

Shortly after taking the job, Mr. Elop scrapped work on Nokia's homegrown smartphone software and said the company would use Microsoft Corp.'s MSFT -1.79%Windows mobile operating system. By doing so, he was able to deliver a new line of phones to compete with the iPhone in less than a year, much quicker than if Nokia had stuck with its own software, he says.

Those phones aren't selling strongly. The company hasn't broken out numbers but said in April that initial sales were "mixed," and two months later said competition had been tougher than expected. Mr. Elop was forced in mid-June to announce another 10,000 layoffs and $1.7 billion in cost cuts that will fall heavily on research and development. On Sunday, Nokia cut the U.S. price of the phones in half, to $50.

Nokia has a long history of successfully adapting to big market shifts. The company started out in 1865 as a lumber mill. Over the years, it diversified into electricity production and rubber products.

At the end of the 1980s, the Soviet Union's collapse and recession in Europe caused demand for Nokia's diverse slate of products to dry up, leaving the company in crisis. Jorma Ollila, a former Citibank banker, took over as CEO in 1992 and focused Nokia on cellphones.

Nokia factories eventually sprang up from Germany to China, part of a logistics machine so well-oiled that Nokia could feed the world's demand for cellphones faster than any other manufacturer in the world. Profits soared, and the company's share price followed, giving Nokia a market value of €303 billion at its peak in 2000.

Mr. Ollila and other top executives became stars in Finland, often requesting private dining rooms when they went out to eat, senior executives said.

Early on, the CEO started laying the groundwork for the company's next reinvention. Nokia executives predicted that the business of producing cellphones that do little but make calls would lose its profitability by 2000. So the company started spending billions of dollars to research mobile email, touch screens and faster wireless networks.

In 1996, the company unveiled its first smartphone, the Nokia 9000, and called it the first mobile device that could email, fax and surf the Web. It weighed slightly under a pound.

"We had exactly the right view of what it was all about," says Mr. Ollila, who stepped down as chief executive in 2006 and retired as chairman in May. "We were about five years ahead."

The phone, also called the Communicator, made an appearance in the movie "The Saint" and drew a dedicated following among certain business users, but never commanded a mass audience.

In late 2004, U.S. manufacturer Motorola scored a world-wide hit with its thin Razr flip-phones. Nokia weathered criticism from investors that it was expending too much effort on high-end smartphones while its rival ate into its lucrative business selling expensive "dumb" phones to upwardly mobile people aroun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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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Olli-Pekka Kallasvuo, Nokia's former chief financial officer, took the helm from Mr. Ollila in 2006, he merged Nokia's smartphone and basic-phone operations. The result, said several former executives, was that the more profitable basic phone business started calling the shots.

"The Nokia bias went backwards," said Jari Pasanen, a member of a group Nokia set up in 2004 to create multimedia services for smartphones and now a venture capitalist in Finland. "It went toward traditional mobile phones."

Nokia's smartphones had hit the market too early, before consumers or wireless networks were ready to make use of them. And when the iPhone emerged, Nokia failed to recognize the threat.

Nokia engineers' "tear-down" reports, according to people who saw them, emphasized that the iPhone was expensive to manufacture and only worked on second-generation networks—primitive compared with Nokia's 3G technology. One report noted that the iPhone didn't come close to passing Nokia's rigorous "drop test," in which a phone is dropped five feet onto concrete from a variety of angles.

Yet consumers loved the iPhone, and by 2008 Nokia executives had realized that matching Apple's slick operating system amounted to their biggest challenge.

One team tried to revamp Symbian, the aging operating system that ran most Nokia smartphones. Another effort, eventually dubbed MeeGo, tried to build a new system from the ground up.

People involved with both efforts say the two teams competed with each other for support within the company and the attention of top executives—a problem that plagued Nokia's R&D operations.

"You were spending more time fighting politics than doing design," said Alastair Curtis, Nokia's chief designer from 2006 to 2009.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was so convoluted, he added, that "it was hard for the team to drive through a coherent, consistent, beautiful experience."

In 2010, for instance, Nokia was hashing out some details of software that would make it easier for outside programmers to write applications that could work on any Nokia smartphone.

At some companies, such decisions might be made around a conference table. In Nokia's case, the meeting involved gathering about 100 engineers and product managers from offices as far-flung as Massachusetts and China in a hotel ballroom in Mainz, Germany, two people who attended the meeting recall.

Over three days, the Nokia employees sat on folding chairs and jotted notes on an array of paper easels. Representatives of MeeGo, Symbian and other programs within Nokia all struggled to make themselves heard.

"People were trying to keep their jobs," one person there recalls. "Each group was accountable for delivering the most competitive phone."

Key business partners were frustrated as well. Shortly after Apple began selling the iPhone in June 2007, chip supplier Qualcomm Corp. QCOM -1.29%settled a long running patent battle with Nokia and began collaborating on projects.

"What struck me when we started working with Nokia back in 2008 was how Nokia spent much more time than other device makers just strategizing," Qualcomm Chief Executive Paul Jacobs said. "We would present Nokia with a new technology that to us would seem as a big opportunity. Instead of just diving into this opportunity, Nokia would spend a long time, maybe six to nine months, just assessing the opportunity. And by that time the opportunity often just went away."

When Mr. Elop took over as CEO in 2010 Nokia was spending €5 billion a year on R&D—30% of the mobile phone industry's total, according to Bernstein research. Yet it remained far from launching a legitimate competitor to the iPhone.

Before the latest round of cuts, he said, the company was still struggling to focus on useful R&D. Mr. Elop has sifted through data and visited labs around the world to personally terminate projects that weren't core priorities—like one to help buyers in India link their phones to new government identification numbers.

Mr. Elop is refocusing around services like location and mapping, which came with the company's $8 billion 2008 acquisition of Navteq.

But he is having trouble rolling out products that catch on with consumers. Nokia's latest phone, the Lumia, has been well reviewed, but sales may suffer as consumers hold out for the next version of Microsoft's software, due later this year.

Jo Harlow, whom Mr. Elop appointed head of smartphones shortly after he became CEO, said Nokia will launch lower-priced Lumia devices in the coming months to better compete with aggressive Asian device makers such as China's Huawei Technologies. Ms. Harlow said the company is also "very interested" in entering the tablet market.

Mr. Elop has shaken up a sales and marketing department, replacing Chief Operating Officer Jerri DeVard and two other executives after the Lumia launch. In June, Mr. Elop picked Chris Weber, a 47-year-old former Microsoft colleague who had been running Nokia's North American effort, to take over. Ms. DeVard couldn't be reached for comment.

Nokia still is struggling to turn its good ideas into products. The first half of the year saw Nokia book more patents than in any six-month period since 2007, Mr. Elop said, leaving Nokia with more than 30,000 in all. Some might be sold to raise cash, he said.

"We may decide there could be elements of it that could be sold off, turned into more immediate cash for us—which is something that is important when you're going through a turnaround," Mr. Elop said.

Write to Anton Troianovski at anton.troianovski@wsj.com and Sven Grundberg at sven.grundberg@dowjones.com

 

 

 

 

한국어 번역본

 

By ANTON TROIANOVSKI and SVEN GRUNDBERG

노키아의 수석디자이너였던 프랭크 누오보는 10년여 전 이동통신사와 투자자들 앞에서 모바일인터넷의 미래를 예측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기 7년여 전에 버튼 하나 위에 컬러 터치스크린이 있는 휴대전화를 선보인 것이다. 음식점을 찾고 레이싱게임을 하고 화장품을 주문할 수 있는 기기였다. 1990년대 후반 노키아는 비밀리에 또 하나의 제품을 개발했다. 인기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애플 아이패드처럼 무선인터넷연결과 터치스크린이 탑재된 태블릿컴퓨터였다.

당시 슬라이드를 보면서 누오보는 “우리가 완전히 잡을 수 있는 시장이었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기기는 출시되지 않았다. 연구개발에는 엄청난 돈을 들이면서도 제품출시기회를 낭비하는 노키아 기업문화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1990년대 무선혁명을 이끈 노키아는 스마트폰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지금, 노키아는 주가가 폭락하고 수천 명의 직원이 정리해고되는 가운데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내놓기 위해 고투 중이다.

14년 동안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제조사였던 노키아는 올해 삼성전자에 1위 자리를 내주었으며 저가 휴대전화 제조사에 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다. 시장데이터업체 IDC에 따르면 2007년 말 40.4%라는 점유율을 누렸던 노키아의 올해 일사분기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이 전년 동기의 27%에서 추가 하락한 21%를 기록했다고 한다.

금년 일사분기 재무보고서에서도 노키아가 처한 상황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3억4,440만 유로 이익을 기록했던 전년 동기와는 달리 9억2,900만 유로 손실을 기록한 것이다. 매출은 29% 하락한 74억 유로였으며 휴대전화 판매대수는 24% 하락한 8,270만 대였다. 목요일 이사분기 재무성과를 발표할 예정인 노키아는 이미 휴대전화 사업부문 손실이 기대치보다 나쁠 것이라고 예고했다. 올해에만 64% 하락한 노키아 주식은 현재 1.37유로에 거래되고 있다.

Bloomberg
The new Nokia Lumia 900

지난 10년 동안 애플이 지출한 연구개발비보다 약 4배나 많은 400억 달러를 연구개발에 지출했음에도 노키아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다. 휴대전화산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파벌싸움 때문에 개발노력이 분열되고 휴대전화를 시장에 출시하는 부문과 연구개발부문이 유리된 데 따른 결과이다.

베스트셀러 기기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대신 연구개발에 돈을 뿌린 결과, 2개 이상의 개발중단된 운영체제와 60억 달러 규모의 특허만이 남게 되었다. 현재 특허가치가 노키아 시장가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스테판 엘롭 최고경영자는 전세를 역전시킬 때까지 노키아를 연명시키기 위해 특허매각에 들어갈 예정이다.

“연구개발을 통해 개발된 기기들이 실제로 출시되었다면 노키아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고 엘롭 최고경영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말했다.

변동이 심한 휴대전화시장에서 길을 잃은 기업은 노키아 뿐만이 아니다. 블랙베리 덕택에 우위를 누려왔던 리서치인모션 역시 아이폰에 대적할 만한 기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리서치인모션의 시가총액은 약 90% 감소했으며 리서치인모션 최고경영자는 투자자들에게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 중이다.

시장을 파악한 제품을 개발하지 못한 리서치인모션과는 달리, 노키아는 오늘날 소비자들이 열심히 사들이고 있는 제품과 비슷한 종류의 기기를 개발했으나 출시하지 않았다. 아이폰이 스마트폰시장에 변혁을 가져온 시점에 스마트폰에서 일반 휴대전화로 중점을 변경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애플이 우리가 생각했던 개념의 제품을 내놓았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프랭크 누오보는 말한다. “아이폰이 고유한 개념이며 기기라는 말을 들을 때면 화가 난다.”

캐나다 출신으로 2010년 노키아 최초의 외국인 CEO가 된 엘롭 최고경영자는 시장우위 때문에 자기만족에 빠졌던 노키아의 집중력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취임 직후 엘롭 최고경영자는 자체 스마트폰 운영체제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제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윈도우로 갈아탄 덕에 자체 운영체제를 고수할 때보다 훨씬 빠른 1년이라는 기간 내에 신규 라인 루미아를 출시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루미아폰은 저조한 매출을 보이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발표하지 않은 노키아는 4월에 초기 매출성과가 “반반”이라고 밝혔으며 2개월 후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6월 중순 엘롭 최고경영자는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한 17억 달러 비용삭감과 1만 명 직원감축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주 일요일 노키아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루미아 가격을 반으로 깎았다.

[슬라이드쇼 보기]

노키아는 오랜 세월 동안 시장의 거대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왔다. 1865년 제재소로 출범한 노키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력생산과 고무제품으로 사업부문을 다각화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무너지고 유럽 경기침체가 닥침에 따라 다양한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말라붙으면서 노키아는 위기에 처했다. 시티뱅크 출신으로 1992년 취임한 요르마 올릴라 최고경영자는 휴대전화 집중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글로벌 휴대전화 수요를 다른 제조사보다 빨리 충족시키기 위한 물류전략의 일환으로 독일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 노키아 공장이 지어졌다. 이익이 급증했으며 주가가 따라 오르면서 2000년 전성기 당시 노키아 시가총액은 3,03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핀란드에서 유명인사 반열에 오른 올릴라 최고경영자 등 고위임원이 음식점에 갈 때면 전용연회실을 요구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올릴라 최고경영자는 취임 초기부터 노키아 차세대 혁신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임원진은 통화기능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는 휴대전화가 2000년 즈음에는 수익성을 잃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에 따라 노키아는 모바일 이메일과 터치스크린, 빠른 무선통신망 연구개발에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기 시작했다.

1996년 노키아는 자사 최초의 스마트폰 노키아 9000을 내놓으면서 이메일과 팩스, 인터넷기능이 있는 최초의 모바일기기라고 홍보했다. 중량은 450그램 가량이었다.

Dan Krauss for The Wall Street Journal
Frank Nuovo’s past Nokia cell phones.

2006년 최고경영자직에서 물러났으며 금년 5월 회장직에서 은퇴한 요르마 올릴라는 “스마트폰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했었다. 업계보다 5년이나 빨랐다”고 말한다.

커뮤니케이터라고도 불린 노키아 5000은 영화 ‘세인트’에 등장했으며 일부 사업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는 했으나 대중적 성공은 기록하지 못했다.

2004년 말 미국업체 모토로라는 얇은 휴대전화 레이저로 글로벌 히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은 경쟁업체가 값비싸고 “기능이 별로 없는” 휴대전화시장을 잠식하고 있는데도 노키아가 고기능 스마트폰에 너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고재무관리자였다가 2006년 최고경영자 직에 오른 올리페카 칼라스부오는 스마트폰과 일반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통합했다. 그 결과 수익성이 더 높은 일반 휴대전화사업이 스마트폰 사업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고 임원들은 전한다.

2004년 노키아가 스마트폰에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 회원이며 현재 벤처자본가로 활동하고 있는 야리 파사넨은 “노키아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반 휴대전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고 말한다.

노키아 스마트폰은 일반소비자와 이동통신사가 준비도 되기 전에 너무 일찍 출시되었고 그 후 아이폰이 등장했다. 노키아는 아이폰의 위협을 인식하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들이 내놓은 분석보고서는 아이폰 제조단가가 비싸며 노키아의 3G에 비해 원시적인 2G네트워크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 보고서는 아이폰이 1.5미터 높이에서 전화기를 다양한 각도로 떨어트리는 노키아의 엄격한 “추락테스트”를 전혀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아이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2008년 노키아 임원들은 아이폰의 세련된 운영체제에 대항할 만한 운영체제를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노키아 스마트폰 대다수에 탑재되어 있던 구식 운영체제 심비안을 개선하려는 팀도 있었고 처음부터 운영체제를 새로 개발하려는 팀도 있었다.

당시 프로젝트 관계자에 따르면 두 팀이 사내에서 지원을 이끌어내고 고위임원의 관심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쟁은 노키아 연구개발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내정치싸움에 디자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수석디자이너로 근무했던 알레스테어 커티스는 말한다. “조직구조가 워낙 복잡했기에 일관적이고 미적인 경험을 완성해 내기가 어려웠다.”

2010년 외부개발자가 노키아 스마트폰에 호환되는 앱을 쉽게 개발하개 해주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세부사항에 대한 회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이러한 의사결정이 회의실에서 이루어지지만, 노키아의 경우에는 엔지니어 100여명, 중국과 메사추세츠 등 각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제품관리자들이 독일 호텔 연회장에 모여 회의를 벌였다고 한다.

회의가 진행된 3일 동안 직원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이젤에 메모를 했다. 각 프로젝트 대변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모두 자기 일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각 팀은 가장 경쟁력 있는 휴대전화를 내놓아야 한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핵심 협력업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애플이 2007년 7월 아이폰을 출시한지 얼마 후 칩공급업체 퀄컴은 노키아를 상대로 한 오랜 특허 법정전을 합의로 마무리짓고 프로젝트 협력을 시작했다.

Bloomberg
Nokia CEO Stephen Elop

폴 제이콥스 퀄컴 최고경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8년 노키아와 처음 협력하면서 놀랐던 점은 노키아가 다른 기기제조사에 비해 전략수립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노키아에 큰 기회가 될 만한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면 기회를 당장 포착하는 대신 6~9개월을 들여 기회를 평가했다. 그때쯤이면 이미 기회가 지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10년 엘롭 최고경영자가 취임했을 때 노키아는 전체 휴대전화산업의 총 연구개발비 30%에 이르는 50억 유로를 매년 연구개발에 지출하고 있었음에도 아이폰에 대항할 만한 스마트폰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비용삭감 결정이 있기 전부터 노키아는 유용한 연구개발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각국의 연구소를 방문해서 핵심우선순위가 아닌 프로젝트를 직접 폐기했다. 인도 소비자들이 정부 신규 식별번호에 휴대전화를 연결하게 해주는 프로젝트도 이중 하나였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2008년 80억 달러에 내브텍을 인수하면서 수중에 들어온 위치 및 지도서비스에 대한 집중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이 호응하는 스마트폰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신 스마트폰 루미아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소비자들이 올해 말 출시예정인 윈도우 8을 기다림에 따라 매출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엘롭 최고경영자 취임 직후 스마트폰 부서장으로 임명된 조 할로는 화웨이와 같은 저가스마트폰 제조사와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 수개월 내에 루미아 저가라인을 출시할 예정이라 밝혔다. 또한 태블릿시장 진출에도 “매우 관심이 있다”고 한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루미아 출시 이후 제리 드바드 최고운영관리자 등 고위임원 3명을 해임하면서 영업 및 마케팅부서를 개편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으로 노키아 북미사업부문을 이끌던 크리스 웨버가 신임 최고운영관리자로 선임되었다. 드바드 전 최고운영관리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노키아는 여전히 좋은 아이디어를 제품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엘롭 최고경영자는 올해 상반기 2007년 이래 최대 건수의 특허를 등록한 노키아가 3만 개 이상의 특허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일부는 현금확보를 위해 매각할 수 있다고 한다.

“특허 중 매각해서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결정할지도 모른다. 재기를 위해서는 현금확보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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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it-times.kr/sub_read.html?uid=50634&section=sc5&section2=%BE%F7%B0%E8%B5%BF%C1%A4

 

KISDI 신임 원장에 김동욱 서울대 교수

경사연, 7일 심사…1차 투표서 과반수 이상 득표
“급변환경 대응, 방통정책 대안 정립 위해 최선”
 
심우성 기자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차기(10대) 원장에 김동욱(52, 사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선임됐다.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사장 박진근)는 7일 오후 4시 서울 양재동 외교안보센터 내 연구회에서 임시이사회를 개최해 KISDI 차기 원장 선임을 위한 심사를 진행, 김동욱 교수를 차기 원장으로 결정했다.

김동욱 서울대 교수, 이명호 KISDI 통신정책실장, 이봉호 서울여대 교수 등 3명의 후보를 대상으로 진행된 이날 심사에서 김동욱 교수는 심사위원들로부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차기 원장으로 선출됐다.

이날 심사는 경사연 이사를 비롯한 17명의 심사위원 중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후보 3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1차 투표에서 김동욱 교수가 과반수 이상을 득표해 일찌감치 차기 원장으로 결정됐다.

차기 원장으로 선임된 김동욱 교수는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과 정책의 발전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식견을 갖고 있으며, IT산업 발전과 이용자 복지를 위한 정책수립 프로세스에 대한 통찰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심사 발표 직후 김동욱 교수는 “지금은 사실 얼떨떨하다. 급변하는 방송통신 환경 속에서 KISDI의 막중한 임무가 어깨를 무겁게 한다”며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KISDI 조직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접목해 방송통신 정책 방향에 대한 대안을 정립하는 한편 관련 분야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동욱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행정학 석사를 마친 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자정부특별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으로 있다. 

신임 원장의 임기는 9월 10일부터 2014년 9월 9일 까지 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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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김동욱교수님은 저의 계성고 1년 선배로 재학 중에 철야독서실 등에서 가끔씩 뵈었던 분이다. 그 당시 계성고에서 서울대 인문사회계열에 정확히 몇 명이 합겼했는지는 기억이 나지않지만 아무튼 김동욱선배님은 인문사회계열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당시에 인문사회계열에는 법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졸업한 후에도 몇 번 학교로 찾아오셨던 것 같다. 선배님의 고교 앨범사진과 서울대 교수 초임시절의 사진을 실어본다.

김동욱피.jpg   김동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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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그룹 자산 1천447兆…정부수준 육박

재벌닷컴 조사, 상위 5대그룹 52% 차지 연합뉴스 | 한지훈 | 입력 2012.07.01 04:57 | 수정 2012.07.01 05:59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재벌닷컴 조사, 상위 5대그룹 52% 차지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한지훈 기자 = 우리나라 민간 100대 그룹이 작년 말 기준으로 정부 자산의 95% 수준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 부문이 경제권력 면에서 정부 부문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의미다.

1일 재벌닷컴이 발간한 `대한민국 100대 그룹'에 따르면 공기업과 민영화된 공기업을 제외한, 총수가 있는 자산 상위 100대 그룹의 자산총액 합계(2011회계연도말 기준)는 1천446조7천620억원에 달했다.

이는 기획재정부가 5월 말 `2011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에서 공개한 정부의 자산총액 1천523조2천억원에 육박하는 수치다. 100대 그룹의 총 자산이 정부 총 자산의 95% 수준에 도달했다.

정부가 보유한 자산이 비교적 느리게 증가하는 점을 감안하면 100대 그룹의 총 자산은 이르면 2012회계연도에 정부 자산 규모를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100대 그룹별의 자산분포는 상위 5대 그룹에 극심한 편중 현상을 드러냈다.

상위 5대 그룹의 자산총액 합계는 754조원으로 100대 그룹 전체자산의 무려 52%를 차지했다. 정부 총 자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막대한 규모다.

삼성그룹이 자산총액 279조820억원으로 압도적인 1위였다. 현대차(154조7천140억원)와 SK(136조4천670억원)가 뒤를 이었다. LG는 100조7천750억원, 롯데는 83조3천910억원으로 각각 집계됐다.

100위는 신도리코로 자산총액이 1조3천150억원이었다. 삼성의 자산총액에 비하면 212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격차가 컸다.

이윤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재벌에 부가 너무 많이 집중돼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심각한 수준으로 이는 경제 민주화를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현황을 공개해왔지만,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기업집단만을 포함했기 때문에 100대 그룹 현황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정부도 올해 처음으로 도로ㆍ공항ㆍ항만 등 사회기반시설을 자산에 반영했고, 충당부채ㆍ미지급금 등을 부채 항목에 추가해 민간 수준의 `국가 재무제표'를 완성했다.

double@yna.co.kr

han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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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10월 대우그룹에 입사할 당시에 그룹차원에서 신입사원 1000명을 뽑았는데, 신입사원교육을 받은 후 각 계열회사로 배치될 때 나는 (주)대우 (무역부문) --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로 가게되었다. 그 당시 입사영어성적을 우연히 인사부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95점으로 1등 이었고 2등이 88점 이었다. 그해 입사영어시험은 내가 치른 각종 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험으로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다. 운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비록 소속그룹 최고경영진은 바뀌었지만 내가 근무했던 회사가 전보다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다.


참고로, 다음은 국내 최대종합상사들의 2011년도 매출과 영업이익 비교입니다.

[매출]
대우인터 18조7585억 > 삼성물산(상사) 14조2371억원 > 엘지상사 13조9882억원

[영업이익]
대우인터  2388억원 > 엘지상사 1986억원 > 삼성물산 1985억원


[비즈니스 포커스] ‘포스코 인수 이후 1년’ 대우인터내셔널에 무슨 일이   (2011년 10월 19일)


그룹 내 매출 ‘넘버2’…자원 개발 ‘승부수’

지난 9월 30일 미얀마 가스전 개발 현장을 찾은 정준양 포스코 회장과 이동희 대우인터내셔널 부회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정 회장은 “(1년 전) 포스코가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미얀마 가스전”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30일 미얀마 가스전에서 산출 시험을 지켜보는 정준양(오른쪽) 포스코 회장과 이동희 대우인터내셔널 부회장. 오른쪽은 호주 나라브리광산(위)과 미얀마 시추선.


이 부회장도 “2013년 5월 상업 생산이 시작되면 회사의 수익 구조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이후 채권단 관리 하에 있던 대우인터내셔널이 ‘포스코 패밀리’로 재출발한 후 1년이 지난 지금 대우인터내셔널은 자원 개발 전문 기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매출 16조 원(2010년) 규모의 종합상사다. 1967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설립한 대우실업이 대우인터내셔널의 전신이다. 대우그룹의 모태가 된 대우실업 부산 공장도 여전히 별도 사업부로 대우인터내셔널에 남아 있다. 지금은 주로 합성피혁과 첨단 소재를 생산한다.


미얀마 가스전 상업생산 채비

2003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대우인터내셔널은 새로운 성장판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종합상사의 전통적 주력 사업인 중개무역의 수익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그동안 다져온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자원 개발에 승부수를 던졌다.
 
2004년 미얀마 가스전 탐사에 성공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인수·합병(M&A) 대상을 물색하던 포스코가 대우인터내셔널을 탐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포스코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우인터내셔널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포스코가 생산한 각종 철강 제품은 촘촘하게 뻗어 있는 대우인터내셔널의 영업망을 통해 북미 등 세계 각지로 팔려 나갔다. 하지만 16조 원짜리 회사를 사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포스코의 대우인터내셔널 인수는 1990년대 초반 신세기이동통신 설립 후 사실상 최대 규모의 투자에 해당한다. 지난 2분기 포스코 패밀리의 전체 매출 규모는 17조470억 원을 기록했다. 이 중 포스코가 10조320억 원, 대우인터내셔널이 4조6257억 원을 담당했다. 대우인터내셔널의 매출 비중은 27%에 달한다.

지난해 10월 대우인터내셔널에 부임한 이동희 부회장은 그동안 조직 통합에 주력해 왔다. 대우인터내셔널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포스코(철강)와 대우인터내셔널(종합상사)은 ‘업’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해 왔다”며 “기존 대우의 문화와 업무 형태를 많이 인정해 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인수 후 포스코에서 온 인력도 이 부회장을 포함해 4명이 전부였다.

지난 1년 동안 이 부회장이 가장 신경 쓴 것은 기획팀 강화다. 전사 차원의 기획팀도 강화됐을 뿐만 아니라 5개 영업 부문(영업 1~4 부문, 자원개발 부문)에도 자체 기획팀을 신설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기존 사업에 안주하지 말고 신규 시장과 신규 사업 아이템을 적극 발굴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포스코 패밀리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난 지난 1년 동안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것은 자원 개발 분야다. 그중에서도 최근 생산정 시추와 가스 산출 시험에 성공한 미얀마 가스전의 존재가 단연 도드라진다. 대우인터내셔널이 미얀마 해상에서 찾아낸 가스전 3개의 가채매장량은 4조5000억 입방피트(원유 환산 시 약 8억 배럴)로 우리나라 전체에서 3~5년 쓸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2013년 5월 상업 생산이 시작돼도 미얀마에서 채굴한 가스가 국내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중국 국영 석유회사 CNPC의 자회사 CNUOC와 일찌감치 가스 판매 계약을 체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미얀마 가스전 수익은 가스 생산량이 최대에 이르는 2014년부터 20년간 연간 3000억~4000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간 순이익(1220억 원)의 3~4배에 이르는 돈을 미얀마 가스전 한 곳에서 벌어들이게 되는 셈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가스전 성공 스토리는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유·봉제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던 대우인터내셔널은 미얀마 정부로부터 서부 해상 가스전 개발 사업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미얀마 서부 해상은 가스전 발견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미 1970년대 프랑스 메이저 석유회사인 토달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회사들이 달려들어 7개 광구 시추 작업을 벌였지만 끝내 가스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대우인터내셔널은 채권단 주도로 워크아웃에 돌입한 상태였다. 하지만 대우인터내셔널은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꼼꼼하게 과거 실패 사례를 분석한 결과 메이저 기업들이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겉으로 튀어나온 지형만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층서 트랩’이라는 새로운 탐사 기법을 썼다.

겉은 평평하더라도 땅 아래 심층까지 뒤져 원유와 가스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정부에서 지원한 에너지 특별 회계의 성공불 융자도 큰 도움이 됐다. 해외 자원 개발에 돈을 빌려주되 성공하면 대출을 상환하고 실패하면 하지 않아도 되는 지원 정책이다.

드디어 2004년 미얀마 A-1광구에서 슈웨(Shwe) 가스전을 처음 찾아냈다. 슈웨는 미얀마어로 황금을 의미한다. 2005년 A-1광구에서 슈웨퓨 가스전이 추가로 나왔고, 2006년에는 A-3광구에서 미야 가스전이 발견됐다. 하지만 가스전을 찾았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원 개발은 탐사·평가·개발·생산이라는 복잡하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탐사와 평가 단계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커 사업 성패를 가늠하기 어렵다. 현재 미얀마 가스전은 개발에서 생산으로 넘어가는 단계로 큰 고비를 모두 넘긴 상태다.


포스코 그룹 편입으로 신용 등급 상승

한때 미얀마 가스전 사업은 재원 마련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미국이 미얀마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진행한 영향이 컸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중국개발은행(CDB)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중국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미얀마에서 생산하는 가스 대부분이 중국에 판매된다는 점이 작용한 것이다. 아울러 대우인터내셔널이 포스코에 인수되면서 신용 등급이 상승한 덕도 봤다.

미얀마 가스전은 자원 개발 사업에서 대우인터내셔널의 위상을 높이는 지렛대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9월 대우인터내셔널은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국내 대륙붕 탐사에 운영권자로 참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미얀마 가스전 개발 경험을 인정받아 그동안 한국석유공사의 독무대였던 대륙붕 탐사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자원 개발에 종합상사 특유의 강점을 결합한 새로운 사업 모델도 선보이고 있다. 단순히 자원 개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거래를 연계하는 방식이다. 5%의 지분을 확보한 호주 나라브리 유연탄광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지분 투자를 하면서 생산 유연탄 25%를 우선 구매해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지분 투자 수익에다 자원 거래 수익까지 노린 것이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니켈광은 자원 개발과 플랜트 프로젝트를 결합한 것이다. 니켈광 제련을 위해서는 대규모 발전소 건설이 필수적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은 광산 투자와 함께 발전소와 암모니아 저장·하역 시설을 짓는 프로젝트도 따냈다.

포스코 패밀리는 2020년 매출 200조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중 대우인터내셔널이 담당해야 할 몫은 65조 원이다. 현재 16조 원에 못 미치는 매출액을 4배 이상 늘려야 하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10%에도 못 미치는 자원 개발 사업 비중을 대폭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

장승규 기자 sj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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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계절’ 대기업 임원 되면…
연봉 2배 뛰고 3천cc 승용차 확률 0.6% ‘살아남은 자의 기쁨’
등록 : 20111212 21:10 | 수정 : 20111212 22:08

 

골프회원권·비즈니스석
퇴직 뒤까지 예우 ‘뿌듯’
엘지·삼성 가장 파격적
권한만큼 책임 커지고
‘임원=임시직원’ 불안도

» 4대 그룹 부장, 상무 승진때 달라지는 대우
나 부장은 날아갈 것만 같다. 4년 넘게 부장으로 뼈빠지게 일한 결실을 거뒀다. ‘나 상무’가 됐다. 그것도 굴지의 대기업에서. 확률 0.6%의 승부에서 이겼다. 직원 100명에 임원 1명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니까. 신입으로 들어와 부장이 되기까지 별 보고 출근해 별 세며 퇴근해온 20년 세월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친다. 회사에서 주는 차도 골랐다. 날렵하게 빠진 중대형 검은색 3000㏄ 신차로. 골프회원권도 받았고 이제 외국 출장 갈 땐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답답해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당장 월급 통장이 묵직해진다. 부장 때 받던 월급의 거의 두 배다. 아침마다 혼자 쓰는 집무실에 출근하면 비서가 물을 것이다. “상무님, 어떤 차로 드릴까요?”

누구보다 아내가 방긋 웃어주겠지…. 월급 때문만은 아니리라. 늦도록 술에 절어 퇴근하는 나 부장을 보며 아내는 안쓰러워하기도 했지만 때로 바가지도 긁어댔다. “여보, 가정 버리고 회사에 몸바쳤으니 승진은 할 수 있는 거지?” 그래 해냈다! 아내는 이제 남편과 함께 최고급 건강검진을 받고 별 줄줄이 단 호텔에서 임원 부인들끼리 친목 모임도 갖게 될 터다. 골프를 비롯해 각종 취미와 소양교육도 회사 쪽에서 제공받을 수 있다. 고3과 대학생인 아이들도, 엄마가 시켰겠지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빠, 축하드려요.”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명절에 친지들이 모일 때도 큰소리칠 만할 거다.

연말 주요 그룹의 인사철, 숱한 부장들이 상무 승진을 꿈꾸는 계절이다. 4대 그룹 가운데 엘지그룹은 이미 임원인사를 마쳤고, 삼성그룹은 13일 임원인사가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달 말 인사를 앞두고 있으며, 에스케이그룹은 일정을 잡지 못했다.

국내 직원 20만명 중 1700명만이 임원인 삼성, 국내외 통틀어 20만명 직원에 임원은 700명뿐인 엘지처럼, 임원이 된다는 건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다. 최근 경총 조사를 보면, 대졸 신입사원이 대기업 임원이 될 평균 확률은 0.6%으로 2005년(1%)보다 더 어려워졌고 23.6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린다. 어려운 만큼 임원 대우도 파격적이다.

파격적이기론 엘지가 최고다.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하면 연봉이 100% 인상되고 성과급 부여 폭도 부장일 때보다 더 커진다. 모든 임원에게 골프회원권을 주고, 상무는 3000㏄급 승용차도 받는다. 외국 출장 때 비즈니스석 항공권을 이용한다.

삼성도 엘지와 비슷하다. 다만 골프회원권은 대외업무를 맡는 상무한테만 돌아간다. 에스케이는 비슷한 혜택을 상무한테 주지만 급여 상승 폭이 다른 기업보다 낮은 편으로 임원마다 차이가 크다. 4대 그룹 중에선 현대차가 가장 짜다. 급여와 항공권은 업그레이드되지만, 자동차 기업임에도 승용차는 전무부터 지급되고 골프회원권도 임원이라고 무조건 주진 않는다. 포스코·지에스·두산 등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상무에겐 3000㏄급 승용차와 골프회원권, 외국출장 시 비즈니스석이 주어지고 연봉도 부쩍 오른다.

그러나 임원 승진의 기쁨은 짧고 부담은 긴 게 현실이다. 나 상무도 승진할 땐 좋았지만 책임이 너무나 커졌다. 또 1년 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는 데까지 살아남고 더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삼성그룹의 한 상무는 말했다. “부장 땐 임원한테 결재를 받았는데 이젠 부장한테 결재를 해준다는 게 달라졌죠. 권한이 커진 것 이상으로 책임은 훨씬 더 무거워졌습니다.”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라고도 한다. 1년 계약만 보장될 뿐 언제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깨끗이 책상을 비워야 한다. 현대차의 한 상무는 “특별히 퇴직 이후를 준비할 겨를은 없다. 일단 붙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상무 승진 1~2년 만에 회사를 떠나는 경우도 있고, 회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무로 승진하려면 보통 6~7년 상무 시절을 보내야 한다. 이 시간을 지내고도 승진 통보가 없으면 옷을 벗어야 한다. 상무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밀려난다 해도 통상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년까지 임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70% 정도의 급여를 보장하고 사무실을 내어준다. 전무 이상에서 퇴직할 땐 기간이 길어지고 혜택은 더 많아진다.

http://hani.co.kr/arti/economy/finance/5098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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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24일 소셜네트워킹서비스‘구글+’의 개인 페이지에 올린 사진. 서울 포스코센터의 1층 화장실 변기 위에 붙어 있는 쪽지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회사 구글의 에릭 슈미트(Schmidt) 회장이 24일 오전 11시(현지시각)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사진 한 장과 짧은 글을 올렸다. 사진 쪽지에는 '이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기기를 원하는 것은 중요하다(Winning isn't everything, but wanting to win is)'라는 글귀가 한글과 영문으로 함께 적혀 있었다.

이 쪽지는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1층 로비 화장실 변기 위에 붙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슈미트 회장이 지난 8일 한국을 방문해 정준양 포스코 회장을 만나기 위해 포스코센터를 방문했다가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볼일'을 보러 갔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그 쪽지를 찍은 걸 보면 상당한 감흥이 있었던 것 같다.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을 보면 당시 그가 느꼈을 감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인들의 생산성은 매우 인상적이다(impressively productive). 이 표어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들른 사무실 한 곳에서 찍어온 것이다. 한국인들은 1950년대 힘든 전쟁에서 일어나 진정한 경제적 기적(real economic miracle)을 이뤄냈다'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구글코리아의 정김경숙 상무는 "슈미트 회장이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장과 한국인들의 도전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슈미트 회장이 이번 방문에서 한국의 여러 면모에 적지 않게 놀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 방문 전날 SK플래닛의 서진우 사장을 만난 자리도 한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슈미트 회장은 QR코드(격자 무늬로 된 2차원 바코드)가 들어있는 자신의 명함을 서 사장에게 건넸다. 스마트폰의 QR코드 앱으로 명함을 촬영하면 구글 홈페이지가 나오는 기술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서 사장은 빙긋이 웃으며 NFC(근거리 무선통신) 칩이 들어있는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이 명함은 앱을 실행하거나, 촬영하지 않고 스마트폰에 갖다대기만 해도 이름과 연락처 등 정보가 스마트폰에 저절로 나타난다. QR코드보다는 훨씬 진화된 기술이다. 슈미트 회장은 "한국 IT의 발전 속도가 정말 놀랍다"고 감탄하며 "앞으로 협력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한국 예찬'은 슈미트 회장만이 아니다. 최근 여러 CEO들이 한국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칭찬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지칠 줄 모르고 줄기차게 도전하는 직업 윤리(work ethic)다. 세계 최대의 소셜커머스(공동구매) 업체인 미국 그루폰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앤드루 메이슨은 지난 8월 전 세계 지사에 이메일을 보내 "한국식 경영 기법과 끈끈한 조직 문화를 배우자"고 권고했다.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미국 화학회사 헌츠먼코퍼레이션의 존 헌츠먼 회장은 한국인의 불도저 같은 업무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한국에 공장을 세우며 여러 차례 방문했다. 목표가 정해지면 하루에 15시간을 일하면서도 엄청난 집중력·생산성을 보이는 직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헌츠먼 회장은 "이런 한국인 노동력을 잘 활용하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성공의 비결로 꼽는 CEO도 많았다. 지난 3월 방한한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은 자녀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라며 "한국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많은 요인을 가진 나라"라고 말했다.

위기에 강한 한국의 저력을 칭찬하는 기업인도 있었다. 윌리엄 로즈 씨티그룹 수석고문은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의 '금 모으기' 캠페인을 보고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며 "결국 그런 힘이 모여서 한국은 2년 반 만에 외환위기를 가장 빨리 극복했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지난 4일 G20(선진 20개국)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한 유일한 모범 사례"라고 격찬했다.

미국 자동차 업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는 밥 루츠 GM 최고임원은 "5년 전에는 '한국 자동차 산업이 서구 기업에 위협이 될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노(No)'라고 답했다"며 "내가 틀렸다. 한국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Source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26/20111126002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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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11100610424456917&type=1&outlink=2&EV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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