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영작문의 대가 안정효 선생의 공부방법

<무 작 정 영 어 책 100 권 을 읽 고 나 서 영 어 공 부 를 논 하 라 >

1.
처음 두세 권을 읽어내는 동안은 정말로 도대체 책의 내용이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얼마 안 가서 신기하게도 차차 전체적인 의미가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읽기를 계속하면, 네댓 권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어느새 줄거리와 상황의 전개가 조금씩 이해되고, 드디어 눈으로만 익혔던 어휘가 하나 둘 저절로 의미를 드러낸다. 단 한 번도 사전에서 찾아보지 않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뜻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작품의 이해를 위해 정말로 중요한 어휘이거나 궁금해서 알아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단어를 사전에서 하나 찾아볼 때, 그 때는 사전에서 펼쳐 놓은 쪽의 단어를 주욱 훑어 내려가 보라. 그러면 눈으로만 익혔던 수많은 단어가 줄지어 나타나고, "아하, 이런 의미이리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역시!" 라는 깨침이 온다. 이렇게 '감'으로 익혀 배운 어휘는 그냥 줄줄이 암기해서 배운 단어하고는 달라서 절대로 잊혀지지가 않고, 여기에서부터 어휘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단어의 접두어나 접미어 등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나도 모르게 터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읽기에서 어떤 경지에 이르고, 시야가 훤히 틔인다.

2.
영어를 배우러 학원을 찾아가거나 개인 교습을 받기 전에, 우선 최대한으로 영어에 직접 노출되어야 한다. 언어는 교실에서보다 길거리에서 손짓발짓으로 더 빨리 배우기 때문이다.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 는 말을 나는 어느 교실 어느 책에서도 영어로 배운 적이 없으며, "배가 부르다"는 뜻의 " I am full." 이라는 간단한 표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느 외국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처음 알았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구사했던 인해전술, 그것이 영어 공부에서는 '떡보의 원칙' 이다. 단어의 바다로 영어를 휩쓸어 버리는 것 말이다.

3.
1백 권의 영어 소설을 읽고나서 한 권의 책을 영어로 써 보라. 영어의 세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그리고 1백 권의 책을 읽어 내기 전에는 영어를 '배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의 공을 들이지 않고서 영어를 잘하기만 바란다는 것은 귀찮고 시간이 없어 바둑의 행마를 배우지 않겠노라고 거부하면서도 이창호와 같은 천재기사가 되겠다고 꿈꾸는 욕심일 따름이다.

4.
영어 단어의 바다에 빠지기 위한 방법은 영어로 된 소설을 읽은 것 못지 않게 AFKN-TV의 시청이 효과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읽기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덜 받는 반면 텔리비젼 시청은 시각과 청각을 한꺼번에 훈련 시킨다는 장점을 지닌다.

<내 가 영 어 를 ' 본 격 적 ' 으 로 공 부 하 기 시 작 한 것 은>

1.
내가 영어를 '본격적' 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다음 부터였다. 자식의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는 조급한 엄마들이 들으면 기겁할 얘기겠지만, 나에게는 대학에서의 시작만 해도 충분히 '조기'였다. 외국어 공부는 언제 시작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배우느냐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아무리 늦게 시작한다고 해도 조기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피해 의식은 느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초등학교 시절에 몇 달 동안 배우는 수준의 영어라면 고등학교에서는 며칠 사이에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2.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나는 영문과에 입학했으면서도 문학과 영어가 모두 신통치 않다는 자책감에 무차별로 문학 작품을 하루에 두세 권씩 읽어 치우는 한편, 속된 말로 '정신을 차리고' 영어 공부를 위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방학이면 하루도 쉬지 않고 도시락을 싸들고는 텅 빈 학교의 도서관으로 가서 창가에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어로 글을 썼다. 방학이라고 남들이 모두 등산이다 여행이다 놀러 다녀도 나는 도서관에 혼자 않아서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억울하지를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인생을 즐길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3.
내가 12만 단어짜리 첫번째 영어 장편 소설"And Be Quiet at Last (그리고는 침묵만이)" 의 초고를 완성한 것이 1학년 때였는지 2학년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때부터 교수들은 나를 주목하며 개인적으로 창작에 대한 책을 소개하거나 미국의 출판계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으며, 나는 첫 소설을 여기저기 미국 출판사로 보내기 시작했고, 그러는 한편으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 작품은 끝내 미국에서 출판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삶은 그 때부터 정말로 쉽게 풀려 나갔고, 지금까지 나는 직장이라든가 경쟁에 따른 어떠한 근심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4.
3학년 때는 당시 펜클럽 회장이던 백철 선생이 학교로 찾아와 우리말 단편소설 한 편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청탁을 했고, 4학년 때는 "코리언 리퍼블릭" (現 코리아 헤럴드) 의 천승복 문화부장이 만나자고 하더니 신문사에 입사하라는 권유를 했다. 그래서 나의 기자 생활은 이미 대학 4 학년때 시작되었다.

5.
이 모두가 초등학교의 영어 조기 교육이 없이도 가능했다.
나의 '영어로 글쓰기'는 결국 베트남으로 이어졌고, 귀국한 다음에는 대학 시절에 내가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이어령 선생이 "문학사상"에 가브리엘 가르샤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으며, 엔싸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한국 회사의 편집부장을 거치고는 결국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하얀 전쟁"이 미국에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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