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을 76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25년째 영어를 가르쳐 오고 있다. 내가 영어 교사가 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람의 직업은 평소에 생각하고 노력하고 추구하여 얻어지기도 하지만, 간혹 우연히 결정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해야겠다.

내가 지금 영어 교사를 하고 있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자연계를 선택했었다. 그 당시 나는, 만약 내가 인문계를 선택한다면, 아무런 생산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오로지 입만 나불거려 먹고사는 말쟁이 직업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여, 인문계를 좀 떨떠름하게 여겼었다. 그래서 자연계를 선택하여 기술자가 되어 낮에는 공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밤에는 촛불 밑에서 주옥같은 시와 소설을 쓰는 것이 내가 앞으로 추구할 일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야무진 생각은 어떤 사건 하나로 단칼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당시에 나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 고등학교로 왔기에, 그 수준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수업을 이해할 수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도시락을 두 개씩 싸 가지고 가서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남아 공부하겠다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숨과 답답함과 좌절의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기대했던 실력은 별로 나아진 바가 없었다. 성적이라는 것이 노력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때다.

그런데 어느 날, 찬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그런 밤이었다. 다음 날에는 모의 고사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시험이 걱정이 되어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했으나, 눈은 더욱 말똥말똥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위로할 책이나 구할까하고, 옷을 대충 입고, 짐 근처에 있는 중고 서적에 갔다. 마땅한 책이 없어 서성거리고 있는데, 책방 아저씨가 나를 보고, “야 쓸데없이 왔다갔다하지 말고 이 책이나 봐라.” 라고 하면서 책 한 권을 던져 주었다. 나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 황찬호 저 「영어 샘플 테스트」. 나는 집에 와서 몇 시간 그 책을 훑어보고 잠을 잤다.

그 다음 날 영어 시간 ―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책에서 여러 문제가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시험에 출제된 것이 아닌가? 시험을 치는 동안, 시험이 끝난 후,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을 몇 번씩 드나들며 가슴을 쓰다듬으려 노력했지만, 모두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뛰는 가슴과 흔들리는 머리를 소중히 간직한 채, 나는 휘청거리는 발에 의지하여 집으로 왔다. 나는 집에 왔지만,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가눌 수 없어, 머리 없는 닭이 들판을 쏘다니듯 밤거리를 배회했다 ― 휘파람을 불기도하며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이 밤아 빨리 가라. 빨리 내일이 와라. 영어 시간아, 빨리 와라.

드디어 그 다음 날 영어 시간, 선생님은 “이 반에서는 곽영을의 영어 점수가 제일 높다. 곽영을, 76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그 말씀에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박수를 쳤으리라. 아니 야유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는 빨강, 검정, 흰색의 불빛만이 순간적으로 교차하였고, 얼굴은 붉어졌으며, 귀가 멍멍거렸다. 두 손과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다.

하여튼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시고 소설이고 공장에서 일하며 어쩌고 저쩌고가 다 소용없었다. 나의 인생은 그 순간에 영어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치밀한 계획 하에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그 덕택에 나는 3학년까지 자연계 수업을 받았지만, 혼자 인문계 공부를 하여 결국 영어 교육과에 가게 되었다. 그 76점을 소중히 그리고 영원히 기억하면서…….

내 나이 50. 이제 앞으로 살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더 많은 그런 나이리라. 인생을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더 살아도 그리고 이대로 생명이 끝난다해도, 그렇게 슬퍼할 것도, 그렇게 기뻐할 것도 없는 나이리라.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에게 “야, 너 왜이리 늙었냐?”라고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결국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냐마는, 그래도 자신만은 그 범주에서 한참 벗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그런 나이리라.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76점”은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흥분과 감격의 샘물이 되어 내 가슴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이 글은 2001년 10월 인헌고 교지에 기고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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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책을 사면 단어나 숙어 등을 일일이 찾아가며 책을 잡아먹을 듯이 정독을 하되 첫 몇 페이지만 계속 보고 더이상 진도가 안나간다.

2. 단어를 외울 때, 나중에 한방에 고치면 되겠지 하고 발음에 신경 안쓴다. 모든 단어를 거의 독일어식으로 발음한다. Jane을 '자네', deny를 '데니'라고 유창하게 발음한다.

3. 힘에 벅찬 것을 공부해야 영어가 왕창 늘 것이라 생각하고 TIME지나  Newsweek지 같은 미국사람들도 어려워하는 책들만 골라서 본다. 

4. 욕심은 많아서 이 책이 좋다면 이책 사고, 저 책이 좋다면 저 책 사고 책꽂이에 영양가 있는 책들이 수두록 하지만 자기에게 딱 맞는 책은 한 권도 없다.

5.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느긋하게 즐기려고 하지 않고 한 방에 영어를 끝낼 비법만 찾아 다닌다. 결국은 한 가지 방법도 제대로 실천해보지 못하고 갈등과 방황 속에 하루 하루를 보낸다.

6. '어학연수 6개월이면 한 방에 영어 끝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마음의 참 평안을 누린다. 

(최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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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는 이왕에 별로 없지요.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사실 미국 가도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열심히 공부 안하면 영어가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늘지 않습니다. )
그러나 글은 아무 때라도 쓸 수 있죠. 원래 글은 혼자서 쓰는 거잖아여.
글이라도 좀 많이 씁시다.
글을 자꾸 쓰다 보면 말도 조금씩 늘 수 있어요.
저는 원래 회화공부를 많이 했습니다만, 영작문을 하면서 회화실력도 좀 상승한 것 같아여.
저는 요사이도 항상 영어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 잘 안되죠. 생각할 때 영어로 하려면 생각이 잘 안되잖아여.
재미도 없구. 무지 귀찮아요.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어우 미쳐!!
그래도 자꾸 노력했더니 저는 요즘엔 한 70%의 생각은 영어로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우리말로 대화한 내용도 마음속에서 다시 생각할 때는 영어로 고쳐서 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주변에 없고 혼자 있을 때는 소리내어 중얼중얼 합니다.
물론 영어로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 발음을 자꾸 들어도 그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웬지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구요. 신기하죠. 자신감이랄까.
나도 저런 상황에서 영어로 표현해 보고, 또 영어로(비록 나 자신의 발음이지만) 들어 봤다는 묘한 친근감이 들면서 더 잘 들리더라구요.

여러분들도 글을 많이 쓰보세요.
그러다 보면 영어에 대한 수요(=부족함, 필요, 아쉬움)를 느끼게 되고
수요가 있으면 공급(=공부)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죠.

많이 틀려본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죠.
적극적인 실수!!! 이것은 참으로 용기있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참으로 영어에 목마른 자만이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실수들이야 말로 영어(=회화, 작문, 독해, 듣기, 문법, 단어, 숙어...)를 잘하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죠.

여러분, 많이 쓰보세요. 말을 많이 할 처지는 못 되더라도 마음만 먹는 다면 많이
쓰볼 수는 있잖아요. 쓰는 것은 이왕에 혼자서 하는 작업이니까요.
그리고 한번 쓰보는 것은 한번 말해보는 것보다 더 많은 실수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쓰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는 더 어렵고 정밀한 작업이에요. 우리말을 생각해 보세요. 미국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어느 나라 말에서나 쓰는게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복잡해요.

여러분, 작문을 통해 영어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십시오. 그러면 공급(=공부, 관심)은 저절로 발생하게 됩니다. 영어에 대한 수요창출이 꼭 작문을 통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처지에서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오늘도 열심히 영어로 생각하고 쓰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최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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