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안정효씨



“제대로 못하면서 꼴값영어 쓰지 마라”

대한민국 영어도사’를 손꼽을 때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이가 소설가 안정효씨(安正孝·58)다. 대학시절에 이미 영어로 장편소설을 7권이나 썼다는 사람, 지금까지 10여 권의 영문소설과 150여 권의 번역서를 낸 사람,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하얀 전쟁(White Badge)’(1989) ‘은마는 오지 않는다(Silver Stallion)’(1990) 등 자신의 작품을 미국에서 출판한 사람…. 간단한 영문편지나 전자메일을 쓰느라 몇 시간 동안 끙끙거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효라는 이름은 까마득하게 높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된 내력부터 얘기해주시죠.

“대학에 들어가면서 영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부분은 대학에 들어가면 놀잖아요? 나는 그때부터 공부를 했어요. 영어를 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내가 서강대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미술대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서강대가 설립돼 갑자기 진로를 바꾼 겁니다. 제가 서강대 2회 졸업생이에요. 얼떨결에 들어간 게 서강대 영문과였어요.”

―대학에 가면서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기초부터 다시 배웠어요. 당시 서강대에는 미국 신부님들이 수업을 했는데 영어를 모르면 공부를 할 수가 없었거든. 1학년에 들어가니까 영어를 be 동사부터 가르치더라고.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 영어 기초는 배웠지만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지요.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영어 기초를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바둑을 배울 때 처음엔 싸움바둑으로 배우잖아요? 처음 배울 때엔 바둑책을 아무리 열심히 봐도 잘 몰라요. 책을 보고 이해를 해도 금방 잊어버리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순서대로 배운다고 해서 그게 다 소화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단어 생김새만 봐도 의미 안다”

―영어로 소설 쓸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영문학과에 들어갔는데, 문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도서관에 있는 문학관련 책들을 모조리 읽었죠. 그땐 학교가 설립된 지 얼마 안됐을 때니까 도서관에 책이 별로 없었거든요. 다 읽고 나니까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다보니까 내가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처음엔 한글로 소설을 썼어요. 그러다가 영어로 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영문 장편소설 7권을 썼습니다. 그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서관에 나가 살았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의 영어공부 방법에는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외에 특별한 게 없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나는 언어교육이라는 게 갓난아이가 말을 배워나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것을 책읽기를 통해서 겪은 거지요. 말을 하면 순간적으로 휙 지나가잖아요?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중간중간에 멈출 수 있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문법 중심의 파편적인 내용들이고…. 공부란 결국 자기가 혼자 하는 겁니다.”

―선생님의 영어에 대해서는 에피소드가 참 많은 듯합니다. 예를 들면 ‘걷다’라는 영어 표현만 봐도 끝없이 쏟아져 나오더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영한사전을 통째로 다 외웠습니까?

“내겐 영어를 배우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첫째는 영어 책을 읽을 때 사전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이 읽을 수 있고, 단어가 눈에 익게 돼요. 나중엔 생전 처음 보는 단어를 만나도 무슨 뜻인지 감이 잡혀요. 예를 들어 ‘sluggish(게으른, 동작이 굼뜬, 부진한)’라는 단어가 생긴 모양만 봐도 그 뜻이 짐작돼요. 둘째는 일단 사전을 찾으면 펼쳐 놓은 양쪽 페이지를 다 읽었어요. 마치 책을 읽듯이 그 장에 나온 단어들을 죽 훑어봤지요.

이렇게 하다보면 없는 말을 만들어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말로 ‘그 사람 쫀닥스럽다’고 하면 ‘쫀닥스럽다’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영어를 만들어 써도 미국인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걷다’에 대해서 얘기하니까 말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면서 흔히 간과하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말로는 비척비척 걷다, 슬슬 걷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다, 이런 식으로 ‘걷다’라는 동사에 부사와 형용사로 수식을 하잖아요? 그런데 영어로는 이게 각각 한 단어예요. 예를 들어 ‘술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걷는다’면 ‘reel’이라는 한 단어로 충분해요. 이런 건 영어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됐어요. 기껏 장황하게 묘사해놓고 보니까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게 많더라고….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영한사전·한영사전에는 잘못 나와 있는 게 참 많아요.”

―사전적 의미와 실제 쓰이는 용법이 다른 경우를 말하는 겁니까?

“그런 것도 있고, 많지는 않지만 아예 단어 뜻 자체가 틀린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영한사전에서 ‘모터사이클(motorcycle)’을 찾아보면 ‘오토바이’라고 나와 있어요. 오토바이는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에요. 일본에서 만든 말로, ‘오토모빌(automobile)’과 ‘바이시클(bicycle)’을 합성한 겁니다.

또, 예를 들어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보면 대체로 ‘one-sided love’ ‘응답받지 못한(unanswer-ed, unreturned) 사랑’이라고 씌어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영어로 그냥 ‘crush’라고 하면 되는데, 우리나라 어느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아요.”

―사실 미국인과 일상 대화를 나눌 때 어려운 단어는 거의 쓰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할 것 같은데요?(웃음)

“나로선 전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인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렵다고 해요. 대체로 영어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영작해보라고 하면 사전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만 골라서 써요. 반면에 정말로 쉽고 많이 쓰는 단어, 예를 들어 ‘쫀쫀하다’ 같이 아이들도 다 아는 말은 오히려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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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부터 제대로, 영어는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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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영어공부 할 때 대체로 회화나 발음에 치중하는 편인데, 영어책을 많이 읽을 경우 발음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지요?

“나는 발음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많은 단어와 의미를 아는 게 훨씬 중요하죠. 우리나라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다르지만, 그 사람들에게 우리말 못한다고 하지는 않잖아요? 미국 남부지역 사투리는 저도 알아듣기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영어 못합니까? 발음이 조금 어색해도 국제회의에 나가서 얼마든지 멋진 연설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머릿속에 든 게 없다는 거지….

또, 영어라면 다들 회화로만 생각하고 가르치는데, 회화는 관광 가서 굶어죽지 않으려고 쓰는 것 아닙니까? 상대방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영어로는 도저히 안 되죠.”

―몇 년 전부터 영어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난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영어 조기교육에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그럴 여력이 있으면 우리말 교육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먼저 우리말, 우리 문화를 배워야 해요. 영어는 그 다음에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영어 때문에 우리말을 익히지 않아요. 내가 모 대학에서 번역을 가르치는데, 번역할 때 ‘쇼핑’이니 ‘에너지’니 이런 말은 쓰지 말라고 하면 학생들이 “그럼 우리말로는 뭔데요?”하고 묻습니다. 우리말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영어부터 가르치는 것에는 정말로 반대해요.”

―요즘은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계십니까?

“소설은 아니고, ‘꼴값영어사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영어 단어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단어들, 이거 문제가 참 많아요. 그런 것들을 모아놓은 거지요.”

―몇 가지 예를 들어주시죠.

“패션이나 미용계통 사람들 말을 들어보세요. 라인(line)이 샤프(sharp)해서 어쩌고…. 이렇게 꼴값들을 떨어요.

또, 지하철에서 칼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놈을 가리킬 때 마니아라는 말을 써요. 아주 나쁜 뉘앙스의 말입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마니아라면서요?”라고 말하며 꼴값을 떨고 있지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어의 80% 이상이 이런 식이에요.

제일 웃기는 말은 ‘파이팅(fighting)’입니다. 파이팅에는 말 그대로 치고받는다는 의미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응원할 때 열심히 ‘파이팅’을 외치지 않습니까? 서양사람들은 이럴 때 ‘go, go, go’라고 해요. 우리 개그맨들이(개그맨이라는 말도 대표적인 꼴값영어예요) 외국에 나가서까지 태연하게 이런 꼴값들을 떨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국제 배드민턴 경기단체에서 경기중인 선수가 점수를 딴 다음에 팔뚝을 치켜드는 몸짓을 못 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었답니다. 이게 한국선수들 때문에 만든 규정이라고 해요. 이런 몸짓에다 ‘파이팅’까지 외치면 ‘너, 나랑 한판 붙을래’ 하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런 규정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조언 한 마디 해주시죠.

“방법이란 게 따로 없어요. 결국 매일 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잘해요. 내 경우는 대학시절 이래로 영어를 늘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실력이 늘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영어공부 하는 걸 보면, 학원에 나가서 회화 몇 달 배우다가 그만둬요. 그러다가 몇 년 지나서 다시 맨 처음 배웠던 데서 다시 시작하고…. 평생 그 자리만 맴도는 거예요.”

―앞으로 갈수록 영어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 것으로 보입니다만….

“관심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넓어지고 있어요. 더 많은 사람이 영어에 관심을 가질 뿐 수준은 거기서 맴돈다는 얘기죠.

나는 정책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만큼 앞으로 영어를 사용할 사람이 많아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어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냅니다. 오히려 우리의 문제는 초등학교부터 모든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발상에 있습니다. 이건 언어의 노예가 되겠다는 것밖에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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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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