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헤럴드’이경희 주필



“좋은 영어 읽어야 좋은 영작 나온다”

문화라는 척도로 봐도 한국은 ‘우물안 개구리’다. 우리끼리는 반만년 문화전통 운운하며 폼을 잡지만, 정작 대다수 외국인들은 우리를 중국문화나 일본문화의 아류 정도로밖에 알아주지 않는 게 현실. 이게 다 ‘영어 못하는 나라’가 겪는 설움이다.

‘우리 전통문화의 세계화 수준’은, 대형 서점에 가서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영문책자가 몇 권이나 진열돼 있는지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기야, 유적지에 서 있는 영어 안내판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해 걸핏하면 지적을 받곤 하는 나라에서, 그동안 정색하고서 우리 전통문화를 세계에 소개하겠다고 나선 이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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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계의 보배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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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의 이경희(李慶姬·52) 주필은, 한 언론계 후배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문화계의 보배 같은 존재’다. 그가 20여 년 동안 영자신문 기자로 일하며 우리 전통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 매달려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그의 영어실력이 무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주필의 경우 해외유학은커녕 그 흔한 단기연수 한 번 다녀온 적이 없다는 사실.

이 주필은 우리나라 최초로 편집국장(1998.2~1999.2)이 된 여성으로도 유명하다. 더욱이 이 편집국장 경력은, 그가 정치부·경제부·사회부 등 언론사의 ‘핵심부서’ 출신이 아니라 문화부 기자로 오랫 동안 활동한 끝에 오른 자리라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앞의 언론계 후배는 “영자신문은 다른 신문보다 지면경쟁이 덜한 편이고, 따라서 기자가 좋은 기사를 발굴해서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문화를 소재로 영어기사 쓰는 일을 20여 년 하다보니 이주필이 쓴 기사는 좋은 자료가 됐고, 당사자는 한국 전통문화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 출신 편집국장이라는 경력은 그런 노력의 작은 결과일지 모른다.

―평생 영어를 쓰는 직업에 종사하셨으니 영어만큼은 누구보다….

“아이구, 그렇지 않아요. 제가 영자신문사에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저 자신은 영어를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외국어란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완벽해질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왜 찾아오셨는지….”

―언론계에 입문하신 게 언제입니까?

“69년 말이에요. 70년부터 ‘코리아 타임스’에서 5년 반쯤 일하다가 75년 여름에 ‘코리아 헤럴드’로 왔습니다. 그 사이 아스팍 사회문화센터라는 국제기구에서 출판홍보 담당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고, 몇 년간은 프리랜서로 뛰었어요.”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손에서 영어를 놓아본 적이 한번도 없으신 거죠?

“그래요. 영어는 늘 썼어요.”

―영어 문장이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잘못된 정보를 들었나본데…(웃음). 나는 항상 자신이 없어요. 지금도 제가 쓴 글은 반드시 미국인이 검토하게 한 다음에야 내보냅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틀린 부분이 나올 가능성은 항상 있으니까요.”

―영어에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입니까?

“우리 때에는 중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부터 영어를 좋아했어요. 그렇다고 남다르거나 유별난 방식으로 영어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 노는 시간에 팝송 듣고 영화 보는 게 일이었지요. 팝송가사나 영화대본을 읽으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다 영어공부였겠죠, 뭐. 그런 식으로 남보다는 영어를 조금 더 많이 접했다고 할까….”

―바람직한 영어공부 방법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흔히들 영어회화 배우겠다고 미국인과 얘기하는 것을 좋은 방법으로 생각하는데, 한두 마디 해봤자 거기서 그치기가 쉽다고 봐요. 내 생각에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사고체계이므로 그들의 생각이나 글을 제대로 배우려면 좋은 글을 끊임없이, 많이 읽는 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영어 배우는 게 끊임없는 고행인 것 같아요. 아이구, 이거 도움이 별로 안되는 것 같아서 어쩌나.”(웃음)

―이주필께서는 어떤 분야의 글을 많이 읽습니까?

“요즘은 바빠서 많이 못 읽어요. 언론계에 있으니까 신문·잡지는 항상 읽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제가 쓰는 글이 시사영어인데도, 신문 잡지만 읽어서는 글이 잘 써진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문학작품을 읽고 있을 때 글이 더 잘 써지고, 흐름도 좋아진다는 느낌을 갖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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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안되면 영어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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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우리말을 잘해야 영어도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어란 사고의 흐름이고, 따라서 결국은 다 통한다고 봐요. 예를 들어 영어로 글을 처음 쓰는 사람이 우리말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말들을 영어로는 할 수도 있다고 오해하고 마구 쓰는 걸 봅니다. 그런 문장은 한국말로 옮겨보면 말이 안돼요. 영어로도 말이 안되는 것은 물론이죠. 우리말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영어로 늘어놓고서, 이건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겁니다. 제 생각엔 언어란 건 능숙해질수록 (글을 쓸 때 한국어와 영어의) 길이가 비슷해집니다.

그런데 제가 전공한 한국의 전통문화는 경우가 좀 다르지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의사전달이 명확하게 안 되는 경우가 있고, 그 문화에서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자신문사에 들어가려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합니까?

“요즘엔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 다닌 사람들도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미국사람처럼 말하는데, 우리 같은 옛날 사람은 그들 앞에서 영어를 쓰기가 좀 뭐할 때가 있어요.(웃음)

그런데 영어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모두 영어로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영어회화는 잘하는데 문법이 약한 경우도 있고, 논리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고…. 이런 게 결국은 독서와 관련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인터뷰 말미에 이주필은 기자에게 자신의 영문저서 두 권을 선사했다. 제목은 ‘Korean Culture : Legacies and Lore(한국의 문화 : 유산과 전승)’와 ‘World Heritage in Korea(한국의 세계유산)’. 앞의 책을 뒤적거리다 우리 전통춤의 한 가지인 승무(僧舞)를 소개하는 장의 첫 문단에 눈길이 오래 멈췄다.

“The Dancer is seated on the stage, with her face and torso bent deep, almost touching the floor. She begins to move from the shoulders, slowly and mysteriously. In a dramatic and solemn gesture, she faces upward, turning her torso to the left and then to the right. Her movements are delicately restrained, but unusually powerful. (…)”

(무용가는 얼굴과 몸이 바닥에 닿을 듯 깊숙이 구부린 채 무대 위에 앉아 있다. 그녀가 양 어깨부터 천천히, 신비롭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극적이고 장중한 몸짓에 이르자 그녀는 얼굴을 위로 향하고, 몸을 왼쪽, 그리고 오른쪽으로 돌린다. 그녀의 움직임은 섬세하게 절제돼 있지만, 동시에 이상하리만큼 강력하다.…”

승무가 표출하는 동(動)과 정(靜)의 미묘한 교차와 흐름을 우리말도 아닌 영어로 이만큼 정밀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얼마나 고르고 다듬었을까? 언론계 후배의 말처럼 그는 분명 ‘보배로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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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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