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기도의 유익
장봉운 목사 (중국선교연구원)


  방언을 처음 받게 되면 신기하고 새로운 감격으로 인해서 흥분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는 좀 달랐다고 생각하는데 처음 시작한 사업이 망해서 무척 어려움을 겪던 시절이었고 아내의 권유로 은사를 받은 동내에 사는 순복음 교회에 다니는 어떤 여집사님에게서 안수를 받는 가운데 혀가 말리면서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줄곧 그 교단에 속한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발길이 닿아 선택한 교회가 모두 통합교단의 교회이었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안수나 방언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흥미도 없었습니다. 사업에서 실패하면서 풀이 죽어 있던 때이었기에 기도를 받게 된 것이지요. 제 아내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받았지만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방언이 나오려고 하면 기도를 중지하였고, 이렇게 계속 거부하니까 언제인지는 몰라도 방언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목사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다가 88년에 소명을 받으면서 다시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방언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아무튼 방언을 처음 하게 되면 신기하고 놀라워 하며, 주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별로 재미도 없고 유익도 없이 그저 의미 없는 단조로운 소리만 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울리는 괭가리 같이 느껴지니까 방언을 하는 것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중도에 그만 두는 사람들이 더러 있고, 방언을 하면서도 별로 유익을 얻지 못하고 그저 하니까 하는 식으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유익하지도 흥미롭지도 못한 것 말입니다. 어떤 것에 흥미를 느껴 그것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 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처럼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방언 역시 이런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은 방언의 유익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하면서도 이것이 방언으로 인해서 오는 유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유익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고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포괄적인 내용을 적고 있지요. 그 까닭은 세대를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게 다 적용되는 최고의 가치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필요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부분을 다룰 수 없습니다. 이 원론적인 성경 말씀이 우리 개인에게 적용되고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지요.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큰 유익은 자신의 영(속사람을 포함함)이 영적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힘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 지적인 힘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지적인 힘은 자신감을 갖게 하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바르게 대처하게 하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게 하는 등의 유익을 주지만 영적인 힘은 지적인 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에 더하여 마귀로부터 보호 받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요. 이 부분이 영적 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방언은 우선 이 부분에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대적인 마귀에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정보가 보호되지 않는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에서는 별로 손해를 볼 것이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기업의 형태를 띄면 반드시 정보가 보호되어야만 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역시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보가 보호되지 않은 채로 방치된다면 우리는 마귀에게 심하게 이용당하거나 침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우리의 정보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상호 교통의 통로로서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가 보호되지 않는다면 중요한 정보가 적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전략이 무용지물이 되어 마귀를 물리치는 힘이 약화됩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은 방언을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지만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능력 행하는 일과 방언이 필수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따라서 기도합니다. 물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영이 전혀 기도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구성으로 기도하는 그 순간 자신의 영이 함께 기도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느끼더라도 보다 막연하고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로 이 부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물론 방언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신의 방언을 별로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방언을 못하는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영이 지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만으로도 유익합니다. 자신의 영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실제적 순간이니까요.

  구체적으로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알아보겠습니다.
  방언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깊이 경험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했고, 우리에게 방언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방언 기도는 우리의 속 사람을 강하게 함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영의 소원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원수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영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며 약점을 지니게 됩니다. 이 약점을 마귀가 알게 되면 마귀는 놓치지 않고 우리의 영을 공격합니다. 이 약점이 노출된 영은 마귀로부터 심각하게 공격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손상을 입게 되며 이 증상은 즉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으로는 영이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영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 그 요구하는 바를 전달하게 되는데요 주로 많이 사용되는 수단이 느낌입니다. 이 느낌에 대해서는 앞서서 다루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영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지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영의 요구하는 바를 깨달아 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방언은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수단이 됩니다. 방언은 영의 요구하는 바를 우리의 의식에 전하는 매체의 역할을 합니다. 물론 방언이 통역 되면 이 부분이 명쾌해지지요. 그래서 방언 말하는 사람은 통역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역은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대가 없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이 부분은 선택사항 즉 옵션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방언은 말할 줄 알면서 통역을 구하지 않아서 그 뜻을 모르는 것이지요. 통역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히 “주님 저에게 통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구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통역은 예언의 기능이 있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지요.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실함이 보장되지 않으면 예언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격 요건이라기 보다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예언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스럽고 은혜로운 자리이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을 살펴야 할 사람이 있지요. 살펴야 할 조건들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성찬에 참여하면 그는 죄를 마시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처럼 예언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신실성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통역을 구하였는데 통역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구한다고 해서 그 즉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충 구하고 주지 않는다고 포기한다면 평생 얻을 수 없습니다. 구하기를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한번 구했으면 주실 때까지 매달리고 애걸하고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방언 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이 부분 역시 개인에 따라서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가 이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면서 그 사이 사이에 사람의 말을 합니다. 그러데 그 말이 자신의 의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신이 압니다. 방언 통역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은 그 내용이 너무 싱겁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설마 통역일까 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중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찮게 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정말로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줍니다. 처음에는 매우 하찮은 것 같은 것으로 우리의 믿음과 자세를 시험하십니다. 쉽게 예를 들면 처음 입사한 신입사원을 대할 때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신입사원에게 처음부터 큰 것을 맡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큰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매우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이것이 통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이런 과정을 많이 겪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하다고 인정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주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그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때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적어도 10년 내외의 기간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얻는 기간이지요. 그러나 3년 정도 지나면 이 비밀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무렵부터 실질적이고 깊이 있는 통역이 이루어지고 기도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함으로써 얻는 유익은 속 사람의 강건이 가장 큰 유익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영은 치유를 받고 청결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방언을 통해서 우리의 영이 청결해집니다. 그리고 방언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에 활력을 얻게 합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방언을 필수입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고는 은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은사를 받는 것은 안지만 방언을 말하지 못하고는 은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방언은 은사의 통로가 됩니다. 특히 능력 행하는 은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이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전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방언의 유익은 깊은 기도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깊은 기도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 통로를 더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통로는 무수합니다. 그 많은 통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에게 익숙한 방법 몇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되지요. 그 많은 방법 가운데 방언은 비교적 손쉬운 방법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우리는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말로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은 그 말에 매이게 되지요. 우리의 의식을 이끌어내는 뇌는 한 가지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오직 의식을 이끌어내는 작용에 쓰임을 받기 때문에 다른 작용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쉼을 얻게 됩니다. 한가해진 우리의 의식은 쉼을 얻어야 하는데 훈련되지 않은 우리의 의식은 쉬지를 않고 분주하게 작용을 계속합니다.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는 우리의 뇌는 제멋대로 작용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무수히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의 쉼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등을 통해서 그 기술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고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기도에 이르지 못하고 항상 겉돌기만 합니다. 떠도는 생각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주님이 방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음성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처음에는 잘 안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묶는 훈련은 생각의 초점을 한군데 모으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정신을 그 곳에 모으십시오. 자칫하면 생각이 달아납니다. 그러면 바로 생각을 모으세요. 달아나는 생각과의 싸움을 계속하면 생각이 자신의 통제에 순종하는 때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의 고삐를 잡아맬 수 있어야 그 다음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세상에는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있지요. 전문가는 그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회자가 아니면 그런 훈련까지는 필요 없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왕초보는 면해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멋대로 떠돌도록 내버려 두면 주님이 주시는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방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하면 우선 떠도는 생각을 묶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훈련하면 쉽게 되지만 혼자 하려면 힘이 듭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훈련원이 필요하지요. 이 훈련을 받고 그 기술을 몸에 익히면 그 기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자동적으로 됩니다. 몸에 익힌 기술은 머리에 넣은 지식과는 달라서 자동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떠도는 생각을 잡는 기술은 훈련을 통해서 몸에 익혀두어야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 두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양한 유익이 있지요.
그런 유익을 얻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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