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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되려는 J에게 건네는 편지
번역가가 되려는 J에게 건네는 편지
번역가가 되려는 J에게,
번역 공부는 잘 되고 있는지요? 그래요,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을 겁니다. 마음먹고 공부하기만 하면 죽순 자라듯 하루가 멀다고 쑥쑥 자라날 줄만 알았는데, 막상 공부해보면 도무지 진전이라고는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지금 하는 방식으로 계속 해야 하는지도 의문스러워질 테지요. 무엇이든 공부는 혼자 하기가 참 어려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왔는지, 아직 초심자의 눈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운 까닭이지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나는 J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만, 적어도 한 가지는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책 번역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J는 순진하거나 아니면 용감한 사람일 겁니다. 순진하다는 것은 세상을 아직 잘 모른다는 이야기고, 용감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무릅쓴다는 뜻이지요. 왜 그러느냐.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J 주위에, 한 달에 10권은 고사하고 한 주에 한 권이라도 꾸준히 읽는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지 헤아려보세요. J가 가끔이라도 연락하는 사람이 100명이라고 할 때, 그 중에 몇 명이나 일주에 한 권 정도 책을 볼까요? 10명? 아마 그조차 되지 않을 겁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러면 그 절반으로 줄여서 일 년에 스무 권 정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 역시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것은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거나 반대로 알면서도 용감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순진함 때문이든 용기 때문이든, 나는 J의 그런 점을 높이 삽니다. 요즘과 같이 돈을 삶의 중심에 두는 세태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인 세상에 살고 있지만,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자본'도 '민주'도 아닌 '행복'이나 '가치'일 것입니다. 가치 있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고 할 때 둘은 같은 맥락으로 쓸 수 있겠지요. 그리고 책은 그런 '가치' 중심 사회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입니다. 굳이 책이 아니어도 무엇이 가치로운지 전달할 수 있으나, 책이 그런 것들의 상징이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 때문에 번역가가 되려고 공부하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번역가는 책에서 가치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책에서 찾아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열의로 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번역가입니다. 그러자면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어떤 책이 좋은지 판별하는 눈부터 길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스스로 지혜로워져야만 합니다. 깊은 지식을 쌓기보다는 지식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지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먼저 두루 읽어서 눈을 넓혀야 합니다. 이것이 요즘 번역가나 작가에게 무척 부족한 듯한데,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자신만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우침 없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놓고 보니, 마치 번역가가 되려면 도부터 닦아야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번역의 길은 수행의 길과 같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번역가는 단순한 기술자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번역하는 책이 독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할 줄 아는, 양심적인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나 역시 이런 면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에,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고, J가 번역가가 된 것에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공부 이야기로 들어가서, 자신의 번역 실력이 느는지 알아내려면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번역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그것조차 모르면서 번역 실력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잣대를 알려면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가르는 요소들을 파악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번역론'이 있어야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런 번역 이론을 습득하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번역이 좋은지 나쁜지 판별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투입해야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냥 앉아서 기다려야만 하는가?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방법을 권합니다. 첫째로 함께 공부하는 겁니다. 여럿이 함께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모자란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비교해보면 자신의 번역 수준을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실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번역가의 번역문을 하나의 견본으로 삼아 공부할 수 있겠지요. 둘째로는 교육을 받는 겁니다. 바른번역에서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운영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J가 보지 못하는 부분도 경험자는 짚어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배울 때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선배 번역가가 스스로 이미 소화한 내용을 좀 더 씹기 좋게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망생이 힘겨운 텍스트와 씨름하는 시간도 압축된다는 겁니다. 불필요한 내용을 공부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간혹 교육 비용이 부담된다며 혼자서 공부하는 지망생도 있고 나 역시 그렇게 공부했지만, 좋은 선생이 없을 때야 그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겠으나 좋은 선생이 있을 때는 오히려 시간을 축내게 됩니다. 제아무리 총명한 학생이라 해도, 경험의 간극까지 뛰어넘기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어떤 텍스트를 공부해야 할지 모른다면 총명함을 발휘할 기회가 언제 오겠습니까. 다만, 좋은 강의는 많지 않으니 잘 판단해야겠지요.
오늘도 두서없이 적다보니 길어지고 말았군요. 부디 흔들리지 않고 계속 공부해나가기 바랍니다. 씨앗을 심어 햇살과 물을 적절하게 주면 싹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노력의 결과를 의심하지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세요. 더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없을지, 지금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는지, 늘 고민하면서 공부하세요. 오늘은 이미 길어졌으니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몸 따뜻하게 하기를.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는 K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