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가 되려는 L에게 건네는 편지


번역가가 되려는 L에게,

이제 제법 날이 많이 따뜻해졌네요. 엊그제 산책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개나리를 보았습니다. 새 생명이 으레 그렇듯, 싱그러움과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여 자신을 터뜨리는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더군요. 번역가로 탄생하려고 몸부림하고 있을 L에게도, 바로 이런 싱그러움과 에너지가 있겠지요.

 

오늘은 번역가가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점을 다시 점검해볼까 합니다. L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한번 뒤돌아보자는 뜻이지요. L이 생각하기에, 번역가라는 일에서 가장 기초는 무엇인가요? 재능? 끈기? 좀 더 구체적으로, 문장력? 이해력? 사고력? 네, 모두 맞습니다. 모두 번역가에게 알짬이라 할 수 있는 자질이지요. 그렇다면 이것들 전부에 공통의 바탕이 되는 활동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독서. 독서야말로 번역이라는 집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기초공사입니다.

 

지금까지 L이 책을 어떻게 읽었든지, 과거는 잠시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능동적 독서'에 힘을 쏟아보세요. 번역가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 즉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독서는 일반 독자처럼 느긋하게 여가 선용하듯 읽는 독서와는 다릅니다. 훨씬 더 치밀하고 고되고 따분하기까지 하기도 하지요. 책을 모두 이런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으나, 그렇게 읽어야 할 책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말 문장을 배우려고 어떤 소설가의 작품을 집어들다고 하지요. 문장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슥, 빠르게 한 번 읽어내려가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 '뻘짓'입니다. 혹은 '자기기만'이라고도 하지요. 이런 식으로는 문장이 나아질 리가 없습니다. 좋은 문장은 표시해두고 옮겨 적어두었다가, 자기 문장에 적용해봐야 합니다. 그러자면 독서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글쓰기도 병행해야겠지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독서란 이처럼, 그저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읽으면서 화자와 저자와 대화한 내용을 글로 써보고, 책에서 던진 철학적/사회적/역사적 문제를 파고들어가보고, 저자의 문장을 흉내 내보는 것입니다.

 

책을 한 권 읽는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일입니다. 세상에 책이 너무나 많아서 한 권 한 권에 담긴 의미를 느끼기가 어렵기도 하고 실제로 함량 미달인 책도 얼마든지 있지만, 어떤 책은 저자가 수년간 천착하어 얻은 빛나는 보고와 같아서, 읽는 이가 수년간의 고된 노동이라는 대가보다 훨씬 가벼운 값으로 저자와 비슷한 위치에 올라가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일전에 소개한 <번역의 탄생> 같은 책도 그러합니다. 거기에는 저자가 십수년 간 온갖 문장과 드잡이하면서 느꼈을 고뇌와 땀이 스며 있습니다. 그런 지식을, 고작 2만원도 안 되는 값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경악 그 자체지요. 이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사회 봉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책에 담긴 내용은 적게 잡아도 번역 대학원에서 1년간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책뿐인가요. 뛰어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은 어쩌면 모두 이와 같습니다.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지요. 훌륭한 작품에는 한결같이 한 사람의 인생 역정이 담겨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읽는 자세는 꼭 필요하겠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토론'하는 느낌의 비판이어야 합니다. 저자가 앞에 있다고 상상하고, 그에게 묻는다는 느낌으로 하면 좋겠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번역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독서는 단순한 지적 유희나 여가 활동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읽어야 할 책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책을 집중해 읽어야 하는지 '능동적'으로 판단하며 읽는 일입니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품과 시간 떼우기 작품에 같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나 작품을 구상할 때나 똑같은 힘을 쓰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워지겠지요. 그런 까닭에, 번역가가 되려는 L처럼 책을 많이 접하고 읽어야 하는 사람은 책에 맞는 독서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독서의 기술>(혹은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 나오듯이, 빠르게 내용을 대강 파악하며 읽을 것인지, 하나하나 분석해가며 저자의 의도와 핵심 주장과 근거 등을 살펴볼 것인지, 다른 작품과 연계해서 비교해가며 읽을 것인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나가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구분하기가 어렵겠지만, 차츰 책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작품도 많고 인물도 많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지요. 번역가라면 적어도, 자기가 번역할 작품을 어느 평론가 못지 않게 음미하고 분석해낼 능력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기본 독서량이 받쳐줘야만 하지요. 부디, 많이 읽고 많이 써보기 바랍니다. 그냥 휘리릭 읽고 잊어버리지 말고, 읽은 내용을 화제로 삼아 글을 써보세요. 그 과정에서 사고력과 문장력과 이해력, 삼박자를 두루 갖출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번역가가 되겠다는 L의 꿈은 이미 눈앞으로 바짝 다가서 있을 것입니다.

 

햇살 좋은 오후, 가볍게 산책하며 자연을 느껴보세요. 감수성을 풍성하게 하는 데 자연만큼 멋진 친구도 없으니까요. 건강히 지내길 바라며,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K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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