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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되려는 P에게 건네는 편지 (퍼온 글)
번역가가 되려는 P에게 건네는 편지
번역가가 되려는 P에게,
무척 오랜만에 편지를 띄우는 것 같군요. 날도 쌀쌀하고 분위기도 가라앉은 연말입니다. 노동 시장도 꽁꽁 얼어붙은 마당에 신종 플루까지 가세하여 젊은이들 기를 꺾어놓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지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오랜만에 펜을 든 것은 P에게 건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 편지를 건넨 지도 1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 P가 공부 시작한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듯하군요. 아마 이쯤 되면 마음을 늘 따라다니는 고민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지요. '내가 번역가가 될 정도로 재능이 있는 건가?'
이것은 어떤 분야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릴 적부터 재주가 남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대개 잘 알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그다지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렇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소중한 재능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쉽습니다.
이런 현상은 또 우리 교육과도 연관이 있지요. 한국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장려하기보다는 '이것을 해야 한다'식으로 밀어붙이는 교육이 대세인 듯하니까요.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재능을 키우기보다는 시키는 일을 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 과정에서 차차 자신의 기호와 재능에 무감각해지게 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찾아나가면 됩니다. 평생 찾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다가 가는 사람도 많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문제는 자기가 번역에 잘 맞는지, 번역에 필요한 재능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가, 그것입니다. 이 의문의 답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그 일에 일정 기간 푹 빠져보면 됩니다.
저는 명상을 한 지 10년이 조금 넘었지만 아직도 이 길이 제가 찾는 그 길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 저에게 가끔은 자신의 길을 권해주는 분들이 계시지요. 선한 의도로 자신의 길을 권해주니 고마운 일입니다만, 저는 그 분들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아직 제가 선택한 이 길도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길이 자신에게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도 최소한 일정 수준으로 시도해보아야 하지 않던가요. 저는 아직 그 단계도 오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길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우선 이 길부터 좀 더 걸어가봐야 합니다."
물론 내가 고민하는 문제와 P가 고민하는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나는 재능과 별로 상관없이, 이것이 내가 찾는 길인지 궁금한 것이고 P는 자신에게 이 길을 걷는 데 필요한 재능이 있는지 궁금한 상황이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은 같습니다. 어떤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알아보려면 최소한 일정 기간 그 일에 투신해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포기한다면 결국 늘 그 일이 가슴에 응어리처럼 남습니다.
이렇게 투신해보고 나면, 우선 자신이 그 일을 좋아하는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실제로 그 일을 해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성향과 맞는지도 조금은 알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자신에게 이 일에 필요한 재능이 있는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판단할 때는 냉정해져야 합니다. 자신이 이 일과 관련해서 과연 얼마나 준비했고, 하루에 몇 시간이나 투자해서 현재까지 얼마나 발전했는지 따져봐야겠지요.
예를 들어 평소 책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 하루에 두세 시간 번역 공부해서 1년 안에 번역가로 데뷔하겠다는 생각은 무척 야무진 꿈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도 재능이 특별한 사람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일반론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겠지요. 아마도 평소 책을 좋아해서 늘 곁에 두고 읽고, 글쓰기를 좋아해서 이제까지 써둔 일기를 모으면 책 몇 권은 되며, 자기가 번역하려는 외국어 소설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정도로 이미 준비한 사람이라면 1년이라는 시간에 어느 정도 판단이 설 듯합니다. 이런 기본이 아직 부족한 상태라면, 재능을 이야기하기 전에 독서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써보는 시간부터 만들어야겠지요. 하루에 매일 3시간 정도 독서와 쓰기 등에 할애해서 10년이 지난 사람과, 같은 기간에 이것을 별로 하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1년 만에 실력이 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냉정하게 판단하라는 말은 이제까지 자신이 읽고 쓰는 데 투자한 시간까지도 따져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실력을 판단할 때는 혼자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 그 중에도 특히 조금 경험 있는 선배의 말을 들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스스로 점검해보는 한 가지 방법은 1년 전에 번역해본 텍스트를, 과거에 번역한 문장을 보지 않고 다시 번역한 뒤 서로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둘을 비교했을 때 1년 후의 번역이 한결 낫다면, 적어도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1년간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번역본을 선배나 주변 사람(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좋겠지요)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들어볼 수도 있겠군요. 이렇게 하면 하루에 몇 시간이나 투자해서 얼마나 발전했는지, 흐릿하게나마 느낌이 올 것입니다.
깔끔하게 포기한다는 표현이 다소 경박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미련 남기지 않고 그만두려면 미쳐봐야 합니다. 자나 깨나 그 일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온 마음을 그 일로 채울 정도로 거기에 빠져봐야 하지요. 그것도 일정 기간 동안. 내 생각에 직업을 결정하는 일처럼 일생에 중요한 선택을 할 때라면 최소한 1년 정도는 부딪혀봐야 할 듯합니다. 더구나 번역처럼 기존 교육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 분야라면 그 기간으로도 부족할지 모르지요. 솔직하게 말해서 실제로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기 시작하고 3-4년 정도가 지나야 비로소 앞으로도 오래도록 해야 할지 아닐지 어느 정도 판단이 설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재능이 있느냐와는 다른 문제이겠지요.
치열하게 도전해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면 마츠모토 타이요의 만화 <핑퐁>을 추천합니다. 운동선수가 되려면 아마도 번역가가 되려고 할 때보다 재능이 더 필요할 테지만 (운동선수로 먹고살려면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가 돼야 하니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본 자세는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번역가가 된다는 것, 번역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멋지기만 한 일은 분명 아닙니다. P가 이 길을 도전해보려고 하는 까닭이 장밋빛 환상 때문이라면, 번역가가 되고 나서 매우 실망할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빨리빨리를 외치며 앞다투어 달려가려고만 하는 이런 시대에, 돈이 최고의 가치로 공공연히 인정받는 어두운 시절에, 남들을 쫓아가기보다 자신의 길을 가려고 도전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가녀린 희망을 봅니다. 부디 스스로 납득하기 전에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은 후회와 미련뿐이니까요.
쌀쌀한 날에 가슴까지 얼어붙지 않기를 기원하며,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는 K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