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어렸다고는 하나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결혼 예복 등이 들어있는 짐을 도둑맞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영문을 알지도 못한채 곧 바로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기적적으로 짐은 돌아왔지만, 하루하루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랴 학교에 다니랴 내 생활에 시간적인 여유는 거리가 먼 애기였다. 제대로 된 인사법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 나가면 숙제 내용은 커녕 숙제를 내준 사실조차도 모르는 참담한 형편이었다. 매일 울다시피 하면서 필사적으로 공부했지만 영어는 숙달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았다.

유학을 가면 누구든 영어 정도는 터득할 수 있다는 말은 모두 헛소문이다. 유연한 뇌를 가진 아이라면 몰라도 하나의 문화와 언어로 이미 머리가 굳혀진 성인은, 단순히 영어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영어를 마스터할 수는 없다. 그 증거로 재미교포 일세들 중 미국에서 반세기를 생활한 이후에도 반쪽 짜리 영어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참으로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무심코 일본에서 가져온 한 권의 문법책이었다. 일본에서 학원 강사를 했던 내게는 친숙한 책이었지만 실제로 영어를 접한 후 다시 읽은 그 내용은 전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따로 흩어진 여러 가지 지식의 조각들이 비로소 충돌을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이런 것이었구나"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참으로 많이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단순한 의문의 해답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성인이 외국어를 기억하려면 어느 정도의 문법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난 그 때 깨닫게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문법만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문법은 필요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문법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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