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온 글]

 

-방언이 안 되시는 분들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시도해야 하는 방법-

 

Part1)

누구나 받았다는 설교를 듣고도 방언이 안 열리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법은 100% 다 방언 받는 방법이야..라는 방법 조차도 자신에게는 튕겨져 나갔던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한 번 안수 받으면 다 방언이 터진다는 그 손길에도 한결같이 끄떡 없으셨던 분들 역시 계실 줄 압니다.

 

남들은 그 방법으로 100%다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데, 유독 자신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 절망감이란 온 우주에서 자신만 혼자 고아가 된 것만 같은 커다란 실망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2006년 즈음부터 사모했지만 일련의 시간들이 흐른 후 비로서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언 때문에 밤 10시 반에 손전등 하나없이 산 정상에 올라가서 부르짖은 적도 있습니다.

오산리 기도원 가서 금식하며 떼쓰다가 우리말만 유창하게 말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손기철 장로님 집회 가서 스텝분에게 방언을 위해서 안수 받았는데 전혀 요동하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에게 쓰러짐 현상만이라도 경험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스텝분께 예의상 넘어져 드리고 누워있다가 그냥 집에 무사히 잘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한 달을 여의도 순복음교회 철야예배에서 기도하다가 저는 방언 못하고

얼떨결에 따라와서 사모하지도 구하지도 않았던 제 후배만 방언을 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동네 개방된 교회에서 불 하나 안켜고 새벽마다 혼자 부르짖은 시간들도 많았습니다.

 

그 때까지 저의 생각 속엔 "방언은 강권적으로 터지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곧 약하게 임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 입에서 무언가가 살며시라도 터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니면 초자연적으로 어떤 말들이 생각이 나거나,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속에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방언 간증들을 접하면서, 강권적으로 이른바 터져나오는 방언도 있지만,

믿음으로 열어 가야지만이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체험만을 기준으로 제시하며 다른 경험들을 멸시하는 의견들에 대해서 저는 솔직히 약간 분노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런 정형화된 기준들 때문에 스스로가 묶여서 오랫동안 방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낙심하고 계신 다른 분들도 분명 예전의 저처럼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방언 간증들을 보시면 극적인 체험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치유같은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해했습니다. "주님, 이 간증들이 정녕 기준입니까?" 그랬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간증 안하는 사람들 중에도 동일한 은혜들을 체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극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혹 분명하게 다가온 경험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간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모든 간증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론 극적이고 분명한 성격들을 주로 띠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러한 간증을 부러운 마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기준을 은연중에 스스로 높게 잡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아..저런 식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구나. 아.. 저런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하지만 당시 방황하고 있었던 저를 구출해 준 분들은, 자신의 체험을 과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간증한

소박하고 진실된 분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분들의 체험이 저에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방언이 터져나오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혀가 강권적으로 말리고 턱이 떨리며 우리말을 하려고 해도 주체할 수 없도록 방언이 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경험을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극적인 회심의 사건을 경험하거나 충만한 기쁨과 감격 가운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많은 은혜의 영역들 가운데서도 극적인 현상과 체험을

수반하는 경우들이 있고, 그와는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론 같은 은혜에 접촉되는 경우들이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저는 유심히 관찰한 결과 알게 되었습니다.

 

Part2)

이래도 저래도 방언이 도저히 안 되시는 분들은 진정으로 어린아이 같이 반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간증들과 이론들로 인해 견고히 높아진 벽을 하나님 말씀과 단순한 믿음의 강력으로 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큰믿음 교회 등록하기 전부터 방언을 위해 기도받았다가, 이미 받았다는 말들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언에 대한 저의 기준은 극적인 간증들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것이 방언일 것이라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그런 애매모호한? 방언이라면 다시 제대로?된 방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상보다 그토록 본질을 추구하고자 달려가는 큰믿음 교회의 흐름 안에서,

저는 어떤 가능성을 스스로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방언이 나타나는 현상보다, 내 안에서 방언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였습니다. 그 동안은 아무리 매달려도 가슴에 멍만 들게 하시지 도무지 응답이 없으신 주님께 대한 원망감이,,

누르고 눌러서 표출하지 않았을 뿐 정말 사무칠 정도로 그런 서운한 마음이 그 당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랄랄랄라~ 를 그저 갑자기 하고 싶어서 내뱉어서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건 내가 의지적으로 흉내내는 것이지, 수많은 간증들에서 보여지는 그런게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시 벼랑 끝에 몰려서인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침노함으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방언은 내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란 다만 혼적인 기도 곧 모국어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랄랄라든 할렐루야 든 상관없다.

나는 모국어가 아닌 어떤 말들을 하면서 그것이 방언 곧 영의 기도 가운데로 접촉된다고 믿을 것이다.

내가 의지적으로 말을 지어내면서 하는 것 같아도 개의치 않는다. 나는 이것이 나의 방언이라고 믿는다.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나 격렬한 느낌이 없이도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초자연적인 언어라고 믿겠다.

주님은 나의 오랜 갈망을 잘 알고 계셨으며 나의 올바른 동기도 이미 감찰하셨다.

내가 잘못 인도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방언을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흉내낸다며 조작한다며 비아냥거려도 상관하지 않겠다.

방언의 본질은 내 발성의 어떠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은사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시다."

 

이렇게 믿고 제가 하는 말을 그저 방언이라고 믿고 의지적으로 말했습니다.

정말 이게 뭐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성령님께서 반드시 올바른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의심도 들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더 지치고 지겨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는 터라 입도 아프고 턱도 뻐근하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냥 어린아이 같이 반응하려고 고군분투 했습니다.

(참고로 먼저 방언을 했던 저의 형님이 어느날 새벽에 갑자기 제게 와서는,

그것을 위해선 어린아이같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도전을 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것을 어떻게 방언이라고 믿고 할 수가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에겐 성경 말씀에 무엇이라고 나와있는지 말씀 분별부터 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위 두 구절 말씀은 모든 영역에서 신자의 믿음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느낌이 없어도, 치유의 느낌이 없어도, 받은 은혜의 느낌이 없어도, 친밀함의 느낌이 없어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미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내가 현재 모국어가 아닌 어떤 말들을 시도하면서 그것이 방언이라고 믿는 것이 곧 믿음입이다.

만일 그 말이 방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믿음은 반드시 응답을 가져오는 역사하는 믿음일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의 고집스러운 자기 생각들을 내려놓고 이러한 믿음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방언이라고 믿고 하는 말들에 기름부음이 느껴졌습니다.(안 느껴져도 상관없습니다만)

남들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여지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그 일들이 제 입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같은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소리가 바뀌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저는 같은 방식으로 시도했음에도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달랐고 다음날이 또한 달라지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전날의 소리대로 시도를 해 봐도 전에는 잘만 되었던 것이 잘 안되고 지금 현재 잘되는 것만 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발음이 새서? 다른 무언가를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이것도 초자연적인 나의 언어일수 있어." 라고 단순히 믿고 그냥 열심히 의지적으로 했습니다.

그런 것 중에는 처음부터 기름부음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몇 일 후에, 새로이 붙잡아 시도했던 그 말들이 제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접촉하려고 시도할 때엔 그저 의지적으로 힘겹게 붙잡고 쥐어짜내듯 한 것들도 있는데,

얼마지 않아 "도대체 이런게 뭐지?" 할 정도의 격렬한 방언으로 변해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너무 신기해서 중간에 웃음 터지고 웃음 참느라 방언을 한 동한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방언 통변을 받아 본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지만, 통변 없이도 저는 제가 하는 방언이 영의 언어라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체험이 언제나 나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거나 절대적인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구원의 현상?이 알 수 있도록 따라온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현재적으로 회개한 상태이고 내 삶을 비우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인 자로서 구원을 확증합니다.

또한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은사들이 나타나고 열매들이 드러나는 것으로 또한 저의 구원을 스스로 확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경로와 방법들에 있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가져와서, 그 기준이 아니면 절대 안된다..라고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은혜스런 무언가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 경험만을 성경적인 기준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터부시하거나 멸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방언 역시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입을 열어 믿음으로 시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이 풀어지는 방법이 여러가지 경로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모함과 올바른 동기와 단순한 믿음으로 시도한다면,

누구나 다 방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얼마든지

방언일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성경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14:5)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Part3)

모국어가 아닌 다른 말들을 그냥 믿음으로 소리내어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건 흉내다..그건 불경건한 방언이다..그런 것은 성령님의 방언이 아니다..

라는 식의 그들만의 자기 이론들은 마음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의 기준이 성령님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현상의 역사들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모순의 극치입니다.

의지적인 연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설령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지적으로 반응하며 사모하는 자에게

또한 풍성한 은혜들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언이 풀어진 후에도 안 쓰던 근육을 움직이는 터라,

그것이 잘 되었다 안 되었다 기복이 생기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도 낙심치말고 계속 시도하셔야 합니다.

"거봐, 가짜 방언이니까 이렇게 또 안 되지.. 진짜 방언은 물 흐르듯 잘 나오는 건데.."

라는 음성에 휘둘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역자분들이 종종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의아해 하는데도, "성도님 지금 방언 하시는 겁니다."

예전엔 그말을 주워들으려 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께선 일선 사역의 현장을 통해 체득한 이러한 원리들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것을 믿으시고 단순하게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기름부음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어도,
'이것이 나의 방언이며 누가 뭐래도 나는 이 방언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겠다'라는 믿음으로 계속 열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확신이 설 때까지 계속입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면, 입 안에서 강하게 흘러나올 수 있도록 그 발성과 조음에도 기름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그러나 기름부음이 안 느껴져도 의심하지 마세요)

내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어떤 말이라도 의지적으로 할 때,

내 안에서 방언의 은사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 영이 기도하게 될 것이며,

이 기도는 영으로 접촉되는 것이며 주님과 영으로 교통하는 통로라고 그냥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이기 때문에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통성기도 시간에 자신이 말하는 그 언어를 방언이라고 믿고 담대히 입을 열어 말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주변의 통변 은사자가 듣고서 가짜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누가 내 것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이런 생각들을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또한 어떤 분은, "제 안에는 성령님이 계신 것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방언의 능력이 제게 와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겠네요."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찾아와 거하실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로써 스스로 확증하시면 됩니다.

죄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고 그 분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의지적 상태를

내면 가운데 확고히 하시면 됩니다. 그 이후엔 역시 내 안에 성령님도 계시고 방언의 능력도 와 있음을

단순하게 믿으시면 됩니다. 느낌과 상관없이 이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체험을 진솔하게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조금 있어 보일려고 미사여구를 사용하지도 않았구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체험처럼

조금도 위장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낙심되고 다른 사람의 체험이 내게 오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주저앉은 상태로 수 년 혹 수 십년씩 흘려보내고 계신 억울한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방언 못하신다고 기죽지 마시고, 반드시 사모하는 심령에게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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