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통역사의 LISTENING 정복기


권선희 (단국대 영문과, 통역대학원)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주일에 한 시간씩이던 영어수업은 그리 재미있지 않았지만,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영어를 접한 덕분에 영어시험이 말 그대로 누워서 떡먹기였다. 그러면서 영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FM을 듣기 시작한 나는 집에서는 항상 라디오를 켜놓았다. 좋아하는 팝송 가사를 구해 따라부르거나 아니면 소리나는 대로 우리말로 적어 불렀다. 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뉴질랜드인과 영국인 펜팔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물론 영어편지쓰기 안내책과 한영사전을 놓고 문장을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5년 넘도록 같은 일을 반복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작실력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고등학교 때 한번은 짝사랑하던 영어 선생님께 영어로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그 편지를 수업시간에 읽어주며 크게 칭찬하시는 바람에 그 황홀감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다.

나는 친구들과 달리 문법을 먼저 공부하지 못했다. 방학이면 친구들이 이런저런 문법책을 뗐다고 자랑했지만, 나는 수업시간에 배운 것 외에는 따로 공부하지 않았다. 시험볼 때도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감으로 찍으면 맞는 경우가 많았다.

내 발음이 정확해야 영어도 들린다

이렇게 재미있어서, 그리고 필요해서 꾸준히 접해오던 영어를 지금은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아직도 영어에 좌절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들보다 영어를 조금 더 많이 접한 사람 중 하나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적어 본다.

영어의 소리는 우리말과 다르다. 영어는 영어식으로 발음하자.

나는 '말하기와 듣기는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믿는다. 따라서 리스닝 실력을 키우려면 자신의 발음과 말하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중요하다.

종종 영어를 한글로 표기하거나 한글을 영어로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 다양한 발음을 표현할 수 있지만 외국어 발음에 대한 완벽한 표기는 역시 불가능하다. 박찬호의 '박'은 Park이 되지만, park을 우리말로 표기할 때는 '파크'가 되는 예를 들 수 있다. 한 언어학자는 영어의 우리말 표기법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영어실력을 한 없이 뒤쳐지게 한다고 주장했다. 영어를 우리말 식으로 발음하면 영어는 방언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면 외국인의 말을 알아듣기도 어렵다. 내가 아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휘를 늘려야 한다

발음이 정확하고 소리는 잘 들어도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즉 소리는 들리는데,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많이 들린다. 가능하면 어려운 말보다는 쉬우면서도 자주 쓰는 단어와 관용어구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머리 속에 남았던 것은 오핸 세월이 지난 후에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듯이, 젊을 때 왕성한 기억력으로 어휘를 익혀 두어야 할 것이다. 영영 사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다.

많이 듣고 말하는 실전경험을 늘려야 한다

영어는 말이다.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지, 수험용이 아니다. 문법이나 어휘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의사소통을 잘하는 건 아니다. 외국인과 마주치면 알고 있던 것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실력 부족을 자책하거나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용기를 내어 외국인과 직접 부딪쳐 보고,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리스닝뿐만 아니라 영어를 잘하는 방법은 영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영어학습은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 등 따로따로 분리해서 논할 수 없다. 따라서 리스닝만을 따로 떼서 공부하기보다는 위의 4가지를 병행해서 총체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영어권 국가에서 생활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당한 기간이 아니라면 어학연수는 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정도의 도움밖에 주지 못하기 때문에 어학연수를 못 간다고 해서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왕도만 찾는다면, 영어는 영원히 고통스런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꾸준히 즐기면서 배우자!




김현수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통역대학원)


아는 단어만 들린다

CNN 통역을 한 지 벌써 4년째, 아직도 영어가 잘 안 들리고 뜻을 몰라 헤매는 일을 가끔씩 겪는다. 그래서인지 리스닝 비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정말 쑥스럽기 그지 없다. 사실 나는 중학시절을 영어권 국가에서 보냈기 때문에 영어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습득한 경우에 속한다.

국내파는 어떻게 공부해야 자연스럽게 영어 청취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체계적 학습법은 차치하고, 재미있게 영어를 배웠던 나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영어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전제조건으로 어느 정도의 어휘력이 요구된다. CNN 뉴스를 듣다 보면 가끔씩 모르는 단어나 숙어가 나온다. 물론 이럴 땐 대충 들리는 대로 철자를 유추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론 열번 백번을 들어도 안 들리는 부분이 있다. 이때는 정말 진땀이 난다. 나중에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 그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서 깨닫게 된다. '이거 정말 내가 몰랐던 단어잖아!'라고. 아예 모르는 단어이니 안 들릴 수밖에.

한번은 '케셰이'라고 들리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케셰이? 이게 뭐지?'하면서 사전을 들었다. kasay도 찾아보고 caisei도 찾아보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철자를 유추해 사전을 뒤져봤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결국 선배 통역사에게 SOS를 쳐서야 문제의 단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공식 인가의 표시' 내지는 '우수성'이라는 뜻을 가진 cachet였다. 마지막 t가 묵음인 불어를 영어에서 찾으려 했으니……. 그 선배는 시사잡지에서 이 단어를 봤는데 발음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결국 어휘력의 차이 때문에 같은 단어를 한 사람은 알아 듣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휘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단어집을 사서 무조건 외운다? 물론 그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추천하고 쉽지는 않다. 억지로 외운 단어는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단어 하나에 예문 하나만 달랑 외워봐야 정작 문맥 속에서 언제 어떻게 쓰는 단어인지 잘 몰라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다.

욕심은 금물, 만만한 책부터 도전하라

정말 머리 속에 오래 남고 나중에 응용할 수 있는 어휘력을 기르려면 평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기서 책이란 부담 없이 항상 들고 다니며 틈 날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소설류를 말한다. 어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겠다고, 난생 처음 보는 어려운 단어가 빽빽한 책을 고르면 곤란하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난해한 책은 즐거운 마음으로 보기 힘들다. 또 억지로 읽은 책은 머리 속에 잘 남지도 않는다. 따라서 쉽고 재미있어 술술 읽혀지는 책을 골라야 한다. 그것이 설령 통속 연애소설이라도 상관없다. 요즘은 환율이 높아 원서를 사서 읽기엔 부담이 많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딱 한 권에 투자하라. 그 한 권이 낡고 떨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영어책 한 권이 자신의 것이 되는 순간, 청취력에도 괄목할 만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취력을 늘리는 데 웬 독서냐구?

단, 영어책을 읽을 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에 손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것! 사전을 찾아보기 전에 항상 앞뒤 문맥으로 뜻을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문맥상 대충 이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뜻을 몰라도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이런 단어들도 일단 표시만 해놓고 넘어가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도 읽은 다음, 그 뜻을 찾아봐도 늦지 않다. 사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찾으면 재미가 반감되고 집중도도 떨어져 다 읽고 나서 사전을 읽은 것인지 소설을 읽은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미이다. 영어책 읽기, 이건 정복해야 할 산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가 되어야 한다.

책을 다시 읽을 때는 표시해 두었던 단어들의 뜻뿐만 아니라 발음을 사전으로 꼭 확인해 두어야 한다. 실제로 나도 tout라는 단어를 불어식으로 '투트'라고 읽었다가 망신당한 적이 있다. tout의 정확한 발음은 '타우트'인데, 이 단어를 책에서 처음 접했을 때 발음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혹자는 '영어 청취력을 늘이는 데 웬 독서?'라며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물론 청취력을 기르려면 많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내가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독서가 청취력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단어도 알아야 들리는 것이다. 그 단어를 부담없이 효율적으로 익힐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책 읽기이다.

게다가 독서는 영어권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리스닝을 하다가 단어는 다 드리는 데 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을 보면 영어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기초가 부실한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해서 기초부터 튼튼히 다지자. 공부도 하고 재미도 있고. 이보다 더 좋은 리스닝 향상법은 없다고 확신한다. 한마디로, 책 속에 길이 있다!






송연석 (연세대 영문과, 통역대학원)


한국사람이 영어 못 듣는 것만큼 자연스런 것이 있으랴

우리가 '투캅스' 같은 영화를 보다가 경찰이나 범인들이 하는 말 중 못 알아듣는 것이 나오면 '뭐지?' 순간 의아해하지만 기가 죽진 않는다. TV 뉴스의 어려운 경제 얘기를 못 알아들으면 경제지식이 부족한 탓이지 우리말을 몰라서가 아니다. 뉴스 보도 중간에 TV를 켰을 때 그 기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처음부터 그 내용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영어로 똑같은 상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100% 알아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리스닝에서 끝장을 보겠노라고 벼르기보다 우선 이런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리스닝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이 말부터 하고 싶다. 내 경험으로는 리스닝이라는 것이 차근차근 연습하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귀가 조금씩 뚫려나가는 게 아니라, 망망대해를 헤엄치듯 하염없이 하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귀가 뻥 뚫리게 되는 것이다.

똑똑한 리스닝이 영어실력을 살린다

소리를 듣기란 쉽다.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순전히 소리만으로 그 단어의 철자를 추측해 사전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피곤할 때 억지로 듣고 있으면 소리는 들려도 그 의미는 한 귀로 빠져 나가게 된다. 바로 hearing과 listening의 차이라고 할까? 문제는 리스닝의 질이지 양이 아니다. 하루 10분을 들어도 그걸 얼마만큼 내 것으로 소화하고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똑똑한 소비가 경제를 살린다는 광고도 있듯이, 리스닝도 마찬가지다. 이제부턴 10분을 100분처럼 듣자!

천하가 다 아는 비법―받아쓰기

그럼 10분으로 몇 시간의 효과를 내려면 어떻게 들어야 할까?

이 땅에 태어나 나름대로 영어공부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받아쓰기를 권하고 있다. 받아쓰기는 경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비법이다. 이것은 정말로 귀찮고 인내를 요하는 힘든 작업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다. 그런데도 좀더 쉬운 지름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 나도 한동안 애써 받아쓰기를 하던 기억이 난다. 대충 아는 단어가 전부 알아들었다고 생각되는 문장도 막상 받아서 놓고 보면 말이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장을 듣는 것과 써 보는 건 그만큼 차이가 있다.

처음부터 무리해서 몇 시간 듣느라 기운빼지 말고, 매일 시간을 정해 짧게 듣는 것이 더 좋다. 집중해서 듣다 보면 쉽게 피곤해져 긴 시간 들을 수가 없다. 초보자가 몇 시간을 듣고도 정신이 말짱하다면 그가 건강체질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리스닝은 양보다 질, 무엇보다 매일 꾸준히 듣는 것이 관건! 매일 듣지 않으면 퇴보한다. 주말에 몇시간씩 테니스를 치는 것보다 매일 30분씩 치는 것이 실력 향상에 훨씬 더 효과적이듯.

첫 출발은 뉴스로

영어에 대한 기초공사가 웬만큼 된 사람이라면 리스닝 훈련은 뉴스로 시작하는 것이 제일 적당하다. 사실 뉴스만큼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없다. 또렷한 표준 발음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설명해주니 흐름을 잘 잡으면 이해도 쉽다. 이 점에서 초보자 리스닝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뉴스는 항상 새로운 소식이다 보니 흐름을 놓치면

꼼짝없이 길 일고 헤매게 된다는 점에서는 어렵기도 하다. 3년 간 밤낮으로 뉴스만 듣다 보니 생긴 요령인즉, 뉴스는 대체로 6하 원칙이 지켜지므로 이를 염두에 두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그만큼 듣는 데 여유가 생기게 된다. 사건이 나오면 그 배경, 원인, 또 결과, 앞으로의 전망, 의의 등이 자연히 따라 나오게 된다.

뉴스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모르는 단어에 얽매여 전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두 단어 모르는 게 나와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만약 외국인이 우리 뉴스를 보다가 '…에 귀추가 주목된다', '대결 구도', '차질이 빚어지다'란 말이 나왔다고 그 때마다 '귀추가 뭐지?', '구도?', '차질이 뭔데?'라고 사전을 뒤진다면 그 리스닝은 단어공부에 그치고 만다.

뿌린대로 거둔다

물론 전체 흐름까지 파악하며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좌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만 쓰고 살아왔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얼마만큼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고 꾸준히 리스닝을 하느냐 이다. 영어는 정말 뿌린 대로 거둔다.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느냐고 반문하기 이전에 과연 내가 '영어의 광야'에 얼마나 씨를 뿌렸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 영어를 전공해 영어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지금도 나는 이따금 영어의 끝은 어딘지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한국인으로서 겪는 당연한 고민이다. 내가 영어에 회의가 느껴질 때는 그동안 뿌린 씨가 다 떨어져 더 많은 씨를 다시 뿌려야 할 시점이 됐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짬을 내서 맘에 드는 뉴스 하나를 골라 받아 적어 보고 새로운 표현이 나오면 정리해 둔다. 자꾸 뿌려야 계속 결실을 맺을 수 있을테니까.




오성호 (외대 영어과, 통역대학원)


'리스닝, 어디 두고 보자'


영어 리스닝에 관한 글을 쓸 때면 항상 떠오르는 일이 있다. 1986년 대학 2학년 1학기였다. 기말고사를 TOEFL L/C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남들이 '토플, 토플'해서 그 이름만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나는 별 생각 없이 시험을 봤다. 하지만 나는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총 50문제 중 6문제를 맞췄다. 더 부끄러운 건 그 중 알고 적은 답은 단 2개였다는 사실.

그전에 나름대로 영어 좀 한다고 우쭐대던 내게 영어가 '아냐, 임마! 넌 아직 멀었어. 니가 무슨 영어를 한다고.'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시험은 내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매일 답만 맞추는 시험만 잘 보면 뭐하냐?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리스닝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해서 나와 영어 리스닝과의 전쟁은 시작됐다.

모두가 한 번씩은 해 본다는 AFKN

AFKN으로 공부를 시작하고서야 AFKN이 American Forces Korea Network의 약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뿌듯했던지.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나자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인간인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TV 화면만 쳐다보고 있자니, '내 자신이 기계나 다를 바 없구나'하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주일만 더 버텨보자고 다짐했지만, 그땐 텔레비젼을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안될까? 생각다 못해 한 어학원을 찾아가 강사를 붙잡고 물었다. 내가 수강생인 줄로 착각한 그 선생님은 열심히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AFKN에 나오는 내용을 글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읽어서 이해가 완전히 되나요? 아니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사전 없이 대강이라도 읽을 수 있는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리스닝은 리스닝만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외국인은 반드시 독해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읽어서 모르는 걸 들어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 때부터 드라마나 영화의 대본을 구해 읽는 연습을 병행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기를 근 다섯 달. 그제서야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가 소리내면서 공부한 단어들을 미국배우들이 직접 말하는 걸 들으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속으로 '짜식들, 니들이 하는 영어나 내가 하는 거나 비슷하네.'라고 우쭐대면서. 들리는 부분이 나오면 미친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사실 들리는 것보다는 안 들리는 것이 훨씬 많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안 들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공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뭘.'이라고 위로해가면서, 서두르지 않고,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관심 있는 분야라면 꾸준히 할 수 있다

영어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끈기'라고 믿는다. 하지만 재미없는 걸 꾸준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내가 좋아하는 분야 파고들기!

내 경우는 음악과 스포츠, 특히 록 음악과 미식 축구는 영어에 새 길을 열어준 은인들이다. 노래에는 가사가 있다. 영어 가사를 무작정 따라 불렀다. 그러다 보면 '이게 무슨 내용의 노래일까?' 궁금하게 되고, 또 찾아보게 된다. 록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관련 잡지를 사 보게 되고, 특별히 관심 있는 기사는 사전을 찾아가며 밤새워 읽곤 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영어가 되는 사람도 스포츠 중계는 꺼리는 경우가 있다. 그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거나, 룰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포츠가 좋은 사람은 중계를 보는 그 자체가 공부가 될 수 있다. 아나운서의 중계는 잘 안 들리더라도 자막에 나오는 점수나 수치 등은 읽을 수 있다. 화면에 보이는 점수를 아나운서들이 말해 주니 들리는 것이다. '1쿼터까지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어쩌고저쩌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스포츠 중계가 차츰차츰 들리기 시작했고, 그러니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한마디!

절대로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영어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물론 TOEIC 이나 TOEFL 등의 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리는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어시험의 고득점자는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에 흥미와 애착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점수도 높다. 시험만 노리고 영어를 접할 경우, 물론 어느 정도까지 점수를 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TOEIC 900점 이상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말이란 끝이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한번도 못 들어 보는 우리말도 있을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로 평생 해도 다할 수 없다.

그저 매일 밥을 먹듯 꼬박꼬박 조금씩 하자.







이지연 (연세대 영문과, 통역대학원)


영어는 아직도 내겐 정복해야 할 에베레스트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어학연수는 사치에 가까웠다. 물론 선견지명이나 용기만 있었다면 교환학생제도를 활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내겐 두 가지 모두 부족했다. 그래서 통역대학원이란 관문을 통과하는 데 남보다 불리했지만, 소위 외국물 한번 먹어 보지 않고 영어통역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통역대학원을 졸업했다고 해서 감히 영어도사라 자신하지 못한다. 내게 영어는 아직도 눈앞에 우뚝 선 태산이며 정복해야 할 에베레스트니까. 그래도 햇수로 20년이 다 되어가는 즐겁고도 고된 전투 끝에 영어는 고맙게도 내게로 다가왔다. 참 놀라운 경험이다.

여기서 나는 그 경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고자 한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학습법이 있겠지만, 국내에서 청취력을 늘리는 왕도는 하나뿐이라고 감히 말하겠다.

서서히 익숙해지기,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상당히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체계적, 단계별 청취 없이는 10년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단계: 백지 상태, 즉 '너 자신을 알라'

영어가 중학교 이상 수준이라면 문장구성에 필요한 기본동사와 몇몇 필수단어는 아는 법. 여기에 소위 말하는 리스닝의 loophole(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그 정도만 갖춰도 말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영단어 50개로 필요한 모든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듣기에 관한 한 어림없는 얘기다. 리스닝은 의사소통의 선결조건이며, 한 차원 높은 영어세계로의 관문이다. 단어 몇 개 들린다고 정상이 가깝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 겨우 에베레스트 밑자락에 서 있을 뿐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시작이다.

일례로 '어떤 병원이 여차저차에서 법정소송에 휘말리게 됐다'는 뉴스를 듣고, '마이클 잭슨이 병원에 입원했다'라고 전혀 엉뚱하게 통역한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왜 이런 번역이 나왔을까? 바로 그의 엄청난 넘겨집기 실력 때문이다. 그 친구는 문장 중에 나온 Jacksonville Hospital을 듣고 모든 걸 유추했던 것이다. 이런 엄청난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hospital 이상의 어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단어 늘리기가 급선무,' 기반 없는 공사는 부실공사이다. 단, 단어 암기는 최단 기간에 끝내는 게 좋다.

2단계: 문장 속의 숙어를 들어라

예를 들어 Chrysler trucks are as American as apple pie.라는 문장에서 apple pie만 없다면 듣기와 해석은 누워서 떡먹기다. 헌데 난데없이 apple pie라니? as American as apple pie는 관용표현으로 '지극히 미국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관용구는 충분한 독해 속에서 터득된다. 다독과 속독의 바탕 없이는 세련된 뉴스 기사와 시사프로 청취는 불가능하다.

3단계: 뉴스 듣고 받아쓰기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점차 그 시간이 팍팍 줄어드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받아쓰기의 목적은 숨어 있는 관사와 복수형 단어 등을 찾아내는 것.

It was as bright as at least a billion Milky Way galaxies or 5 billion of the brightest super novae we've ever seen.

이 예문을 듣고 해석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해도 받아쓰기 과정에서 a billion에서의 관사 a, galaxies와 novae라는 복수형 단어를 찾아내게 된다. 특히 nova(초신성)의 복수형이 novae인 것은 antenna의 복수가 antennae인 것과 같다. 이렇게 숨어 있던 작은 부분을 찾아내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은 큰 즐거움이며 정확하고 세련된 영어회화 구사에도 훌륭한 밑거름이 된다. 여기가 바로 여러분의 청취력이 비약하는 단계다. 3개월만 꾸준히 하면 CNN 뉴스나 AP 뉴스가 쏙쏙 귀에 꽂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말 역시 유아시절 장시간의 학습과 노력에 의해 이뤄진 것임을 상기해 보면, 영어에 투자하는 시간은 정말 아까운게 아니다.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서서히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면 영어는 다가올 것이다.

나의 경험이 여러분의 등반에 작은 힘이 되길 기원한다.

출처: 출 처: 곽중철 YTN 위성통역실의 CNN 리스닝 (주)다락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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