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테이프 몇 개를 수십 번씩 들으면 귀가 뚫린다는 학습법이 한때 우리나라에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듣기테이프 몇 개를 수십 번씩 듣고 나면 귀가 뚫리고 말문이 열릴 수만 있다면 누가 영어 때문에 고민하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어교육에 종사하는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그렇게 될 수 없는 이유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학습법들이 영어 때문에 고민하는 학습자들을 오도하거나 유혹하는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어를 외국어로 습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수십 년간 연구한 실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중에는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상당히 많지요. 영어 듣기테이프를 2-3개 들을 때의 학습 효과와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듣기테이프 3개에 들어 있는 자료의 양은 매우 적다.
보통 회화책 한 권만 녹음해도 60분 짜리 녹음테이프가 2-3개는 됩니다. 결국 듣기테이프 3개는 회화책 한 권 분량을 넘지 못합니다. 이 테이프를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들어도 그것만으로 귀가 뚫리거나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너무 적은 양입니다. 그 속에 포함된 단어/ 구/문장의 수가 너무 적습니다. 참고로 귀가 뚫리기 위해 학습자가 갖추어야 할 다음의 능력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듣기테이프 2-3개를 반복해서 듣는다고 이런 능력들을 갖출 수 있을까요?

1) 낱개의 자모음을 신속하고 정확히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
2) 연속적인 소리의 흐름을 의미단위(sense unit)로 분할할 수 있는 능력
3) 듣기자료 속의 대부분의 어휘/구/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4) 연속적인 소리의 흐름을 사고단위(thought group)로 분할할 수 있는 능력
5) 강세·억양·리듬의 기능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6) 중요한 내용과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가려서 들을 수 있는 능력
7) 듣기자료에 관한 폭넓은 배경지식
8) 주제와 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9) 화자의 의도·목적·주제에 대한 태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10) 예측·추론할 수 있는 능력
11) 들은 주요정보를 일정 기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12) 일정 시간 집중하여 들을 수 있는 능력

위에서 가장 큰 문제는 3)번입니다. 소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이해가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우ㅌ]라는 발음을 듣고 이를 overt라는 철자의 단어일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어떤 뜻인지 모르는 한 청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청해를 위해서는 테이프만 들을 게 아니라 독해 등을 통해 어휘/구문/표현에 대한 지식을 계속 늘려가야 합니다.

외국어 학습에 성공하는 3대 요인은 '강한 학습동기, 양질의 다양한 언어자료에의 충분한 노출, 실제 사용의 잦은 기회'입니다. 듣기테이프 두 세 개만 수십 번씩 반복해서 듣는 것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충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두 세 개의 테이프를 수십 번씩 듣기보다는 20-30개의 테이프를 몇 번씩 듣기를 권합니다.

Don't worry if you don't understand everything when listening or reading; a lot of listening and reading, partially understood, will help you much more than a small quantity where you have understood every word. (듣기나 읽기를 할 때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적은 분량에 대해 단어 하나까지도 완벽히 이해를 하는 것보다는, 부분적으로 이해를 하더라도 많은 양의 듣기/읽기가 더 많은 도움이 된다)

2. 듣기테이프를 여러 번 들으면 영어의 발음체계에 익숙해질 수는 있다.

영어의 자모음에 익숙해질 수 있고, 연음, 동화, 탈락, 등의 발음현상과 영어의 강세, 리듬, 억양 등에도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테이프에 포함되지 않은 단어/구/문장의 발음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테이프 속에 appeal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다음에 appeal을 듣고 알아들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accuse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 bus stop이란 구가 있었다면 다음에 [버-스탑]이란 발음을 들었을 때 bus stop으로 이해할 수야 있겠지만, 그 테이프에 포함되지 않은 [위-쉬]란 발음을 듣고 wish she로 인식할 수 있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결국 그 테이프 속에 포함되지 않은 단어/구/문장의 발음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3. 동일한 테이프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면 이런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던 것을 계속 들으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가령 Th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 can't get a perfect score, you know.(너도 알다시피, 그것이 꼭 내가 완벽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라는 표현을 들었다고 합시다. 초급수준의 학습자라면 처음엔 necessarily, mean, perfect score 등이 특히 잘 들렸을 겁니다. 만일 이 중에 모르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다면 무슨 뜻일까 짐작하는 데 신경을 쓰겠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젠 문장의 구조나 not necessarily mean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데 신경을 쓰게 됩니다. 다시 한번 들으면서 전후 문맥으로 보아 '꼭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듣게 되면 나중에는 발음/단어/구문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의미의 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쯤 되면 "처음에는 안 들렸는데 여러 번 들으니까 이젠 들린다"라는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의 암기할 정도로 이 구문에 익숙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어실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특정 내용의 테이프에만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듣기든 읽기든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한데, 고작 2-3개의 테이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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